개인의 삶은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면야 소소하고 굉장하지는 않다. 오히려 들여다보면 겉모습과 달리 생활의 무게에 짓눌리고 찌든 피로감이 만성적이기도 하다. 남성들은 개인적 피로감을 한밤의 활동으로 지세우려 하고 아이들은 부모님을 따라 일하러 간다. 국민총생산이 올라간 요즘에도 국민 개개인 한사람은 비슷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이세룡의 시들은 이러한 현실을 주목하되 잔잔하고 유머스러우며 조급하지 않게 묘사하는 관점이 재미있다.
오직 약수터
민박집
朴씨댁 담 곁에 서서
오줌을 눈다
오줌을 누며 올려다보는
밤하늘
머리 위에서 와글와글
오른손은 전쟁놀음에 바쁘고
...
主義란
두 번만 빨아도 남는 게 없다는 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일까?
영등포의 밤,
반짝이며
별빛을 나르는,
야근에서 돌아오는 꼬마들
이세룡 시인은 세상을 현실로 바라보되 절망적이거나 현실순응보다는 색다른 시각에서 현실을 드러내고 이로부터 그 생의 무거움을 극복하는 유쾌한 웃음을 주려는 것 같다. 위에 인용한 싯구들은 우리네 여인숙이나 남북대치에 복무하는 군인들, 노력하며 일하는 어린이들의 사정을 보여주고 그 정감을 노래하고 있다. 때로는 비관적인 생의 모습을 묘사하고 때로는 유머로 비틀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이 잔잔하고 조급하지 않은 유머러스함으로 표현되어 선명한 문제 의식이 전달됨과 동시에 각자가 바라봐오던 각기 다른 관점이 하나의 정감으로 모아지는 기분도 든다.
해제에 비평가가 말했듯이 이세룡이 인쇄직과 영화계에 몸담은 경력자라서 영화와 같은 상황 묘사를 하는 것이라는데 느낌이 같다. 시가 아무리 자유로운 매체라고 하지만 글자의 한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이세룡의 시들은 글자가 활자가 되고 선명하게 현실을 포착하게 하면서도 삶의 음영과 우수를 섬세하게 포착하는 매력이 있다. 삶에 대한 연식이란 단지 몇명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는지는 아니지만 이러한 삶이 아니어야 한다면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 같다. 특별히 이 편의 시선집 “종이로 만든 세상”은 앞부분 챕터에 남성과 여성의 관계맺음을 남성의 시각으로 풀어낸 시들이 많다.
그 사연들에 대해 짐짓 모른척하지 않고 직접 묘사를 하되, 유머러스하게 보이는 편이 숨기는 것보다 낫다는 인식 같다. 하룻밤을 보내는 것에 대해 나는 잘 모르지만 이세룡 시인의 시 중에서 이번 시선집에서는 남녀간의 하룻밤을 그려낸 시가 많이 실렸다. 해제를 쓴 평론가는 같은 작가의 다른 시선집에 실린 시들을 우선 보여주는데 그런만큼 이번 시선집에서는 아래와 같은 묘사가 많아서 특징적이다.
나는
씩씩하게
어둠 속을 달려간다.
아나벨리,
네가 돌아눕는 쪽은 향하여
직선으로
무지개를 던진다.
(창가에서 보면
작별의 손 흔드는 줄 알겠지?)
밤의 나그네
가슴에 등불을 켠다.
비탈에서 슬쓸한 가로등
아아, 우리 둘의 새벽잠이 없어지는 시절이 오고
당신 목의 나이테가 하나씩 늘어난다 해도
나의 관심은
우물처럼 깊어지겠지.
아나벨리,
새벽 약수터에서 나를 보거든
그때에도
내 가슴에 구멍을 뚫어다오
딱따구리처럼
내 입술로 나를 쪼아다오
물론 이러한 묘사는 일부이고 시인들이 익히 하는 것 정도다. 다만 언급할 것은 그의 관점이 채택하는 시적 정감의 사용방식이 유머러스하다는 것이고, 이를 실어나르는 시어들이 보여지는 과정이 조급하지 않고 세련된 시어 이해에 기반하기에 경박하지 않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義足을 만들고
과부를 만들고
묵사발이 된 전쟁의 들판.
피를 낭비했다
아아, 힘의 과소비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모조리 망가진 육탄 용사들,
주섬주섬 훈장을 달고
조개무덤 속으로 들어갔다
나란히 나란히
흙으로 된 자궁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아득한 기억 속으로 들어가서
낡은 화로를 찾는다
불을 활짝 피우고
임자없는 암소 한 마리를 때려잡는다
아마득한 선배들이 코를 벌름거리며
불 둘레를 에워싼다
고기 굽는 동굴 속의
디너 파티.
한쪽 구석으로 밀려난 어떤 사내가
깡통처럼 찌그러져 있다
?
밥그릇이 없다.
그렇다.
불 곁에서 멀리 떨어져
떨고 있는 사람의 웅크린 감정은 누구나 같다.
내 추측으로는
그가 이데올로기의 元組.
다른 말로 삶이 전쟁이라면 서로를 침략하는 것이고 “평화와 평화 사이에 전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쟁과 전쟁의 사이에서 평화를 누리는” 것이라는 인생철학이 담긴 시들을 많이 쓰는 것 같다. 청년들은 여전히 2년 2개월을 군대에 다녀와야 하는 현실에서 남성들의 애환, 고기를 구워먹는 소소한 평화를 즐기고, 생이란 전쟁일변도이기보다는 이런 고기구워먹는 평화를 누리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영화와 같은 낭만적인 의미가 주어진다는 것 같다.
진실이 험악하다면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풀어줄 것인가. 누구나 뻔히 아는 그 현실을 어떻게 시로 상승시킬 것인가. 이번 시선집에서는 같은 시인의 다른 시선집보다 육감적인 것에 치중한 시들이 많이 배치되었지만, 동화와 같은 시를 많이 쓰기도 했다.
밤이 내 배를 채우고
걸음이 날 살려 준다면
고통 속에서 맑은
책들이여
다시 나를 불러다오
희망은
먼지처럼 가볍고
고통은 때처럼 더럽고 무섭다
배고픔 외엔 볼 일이 없고
이런 싯구 하나만으로도 절망적인 상태에서 처하게 된 사람들의 꿈이 당장에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언어화된 싯구에서 힘을 얻는 경우도 많다. 이 지구상의 한 국가인 대한민국을 가장 현실적이 공간으로 묘사하려는 일관된 관점에 남북대치의 전쟁, 창가에서의 하룻밤, 고기구워먹는 장면, 어린이들이 야근하고 퇴근하는 순간의 포착, 책을 잊어버린 사회인의 소회 등등이 소재가 되어 하나의 완성된 시로 승화되는데 이 품질이 정말로 좋은 시라고 생각된다.
극복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성인의 질서로부터 메타적으로 관조하고 아이의 위치에서 서 있게 해주면 된다. 각각의 행간, 시어들에는 때로는 과학적 지식도 필요하고, 상징적인 함축을 읽어내는 감각도 필요하다. 결연한 태도로 그냥 눈앞의 생을 살아가고 바라고 해소하고 놀고 일하고 그러면서 생의 장면은 갱신되는 것이다. 다만 개걸스럽게 그리지 않아도 되고 과장된 한스러움도 없이 살다가 가는 인생길을 이번 시선집에서 잘 상징화한 것 같아 재미있게 읽었다.
나 같은 사람은 시선집에 나온 하룻밤 보내는 남성들의 삶과는 다른 종류의 삶이지만 일단 집어든 시선집이라 읽어두었다. 나름대로 40세지만 이런 주제는 잘 글에 반영을 안하는데 해보았다. 어느 정도 분위기를 보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