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정신현상학 저술시 급하게 논증을 추가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난해해지는 부분이 있다고 연구자들은 말합니다. 이 난해해지는 부분은 때로는 외연이 정연하기도 한데요. 헤겔 철학을 정신사적 발달과 자기 도야로 볼때 지양하라의 관점에서 보면 존재 의의를 보존받는 인식자를 전적으로 보호하는게 아닌, 인식자의 한계를 지적하는 듯한 서술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설처럼 존재를 의의 보존하려는 것을 철저하게 엄밀한 기반에서 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헤겔의 서술에서 존재 의의 보존이 빗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후설은 헤겔에 대해 자신의 “엄밀한 학문으로서의 철학”에서 이렇게 비판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낭만주의 철학에서 비로소 변화가 일어난다. 비록 헤겔이 자신의 방법과 학설의 절대적 타당성을 완강하게 주장하지만, 무엇보다 철학의 학문적 성격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비판이 그의 체계에는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과 관련해 낭만주의철학 일반처럼 헤겔 철학은, 엄밀한 철학적 학문을 구성하려는 충동을 ‘약화’시키는 의미에서든 혹은 ‘왜곡’시키는 의미에서든, 다음 시대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다른 대목에서도 비판합니다.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논지를 풀어가는 논증 흐름이 후설에게 비판적 관점에서 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감각적인 것, 통속적인 것, 개별적인 것에 함몰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해내고 그들의 시선을 들어 올려 별을 향하도록 만들려는 힘겹고도 거의 열성적이며 흥분 상태로까지 나타나는 노력은 바로 이런 요구에 부응한다. 마치 사람들이 신적인 것을 모조리 망각한 채 버러지마냥 먼지와 물로 흡족해하면서 한군데에 머물러 있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사고들과 형상들로 가득 찬 광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천상과 연결해주는 빛줄기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빛줄기를 따라서 그들의 시선은 차안의 현전에 안주하는 대신에 이를 뛰어넘어 신적 본질을 향해, 말하자면 피안의 현전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그래서 정신의 눈으로 하여금 지상의 것을 향하도록 만들고서 그것에 고정되게끔 강제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오직 천상의 것만이 지녔던 명징함을 현세의 감각이 빠져 있던 둔탁함과 혼란스러움 안으로 이입시켜서 현전하는 것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즉 경험이라고 불리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타당한 일이 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ㅡ그런데 이제는 정반대의 곤경이 앞에 놓여있는 듯이 보인다. 즉, 감각이 지상의 것에 너무나 고착되어 있어서, 감각을 그 너머로 고양하려면 예전 못지 않은 폭력이 필요한 듯하다. 마치 사막에서 방랑자가 한 모금의 물을 갈망하듯이, 정신은 그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적인 것에 대한 보잘것없는 감정만이라도 갈구하는 듯이 보일 만큼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무엇에 만족하는지에 따라서 곧 정신이 겪은 상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받는 데에 쉽게 만족하고 주는 데에 인색한 태도는 학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감화만을 구하면서 지상에 있는 현존재와 사고의 다양성을 안개로 감추어버리고는 막연한 신성에 대한 막연한 향유를 추구하는 자가 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곳을 잘 살펴보면 무언가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으스댈 수 있는 수단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이처럼 감화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만 한다.”
이 서술에서 보여지는 것은 도야의 관점에서 바라볼때 전단락에서 나온 구원의 가능성을 지닌 인식자가 후단락에서나오는 인색한 태도를 지님을 말하는 외연 이행이라 전적으로 인식자를 구출하려는 후설의 관점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이해한 것 같습니다.
이 경우에는 주어가 생략된 서술에서 유래하는 이해인데요. 헤겔 서술에서 구원 가능성 선기술 후 후기술에서 비판을 한다면 이는 선기술된 구원 가능성은 후설이 의의 보존하려는 존재에게 주어진 서술이고, 후기술된 비판점은 존재를 내친 누군가에게 주어진 서술로 보면 어떤가 하네요.
헤겔 철학 서술에서 존재의 위기를 서술할때 의미 구심점이 구원 가능성에서 비판으로 이행될때 주어가 생략되어 기술한 논증이 있다면, 주어가 다르다고 보는 것을 거의 늘 지속하면 어떨까요?
위의 헤겔 저서에서 나온 서술도 이행에 있어 주어가 생략되어 구원 가능성과 비판점이 마치 구원받는 인식자에게만 적용되는 외연처럼 보이는데요. 이 서술에서 드러내려고 했던 것을 일상언어에서 한계상황에 처한 사람이 토로하는 언어 구조를 드러내려고 한 것으로 해석한다면 후설이 개선 요구한 것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울때 곤란하게 했어요”
라고 한계상황에 처한 인식자가 말했다면 대화의 역동성에 의해 표현이 주어가 생략된 것인데요. 앞엣것과 뒤엣것의 주어를 복원하면 이렇게 됩니다.
“제가 울때 그가 곤란하게 했어요”
이 주어 생략 구조가 대화의 역독성이나 개인의 체험의 강도에 의해서는 주어가 생략될 수밖에 없기에 듣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의 기지가 중요합니다. 이 서술구조를 헤겔이 저술하는 대목에 적용하면 구원 가능성은 체험자(인식자)에게, 비판점은 난국을 적용한 사람에게 귀속되므로, 이렇게 늘 보려고 한다면 후설이 헤겔에게 개선 요구한 것이 이루어지는 이해가 가능해지는 것 같습니다.
위에 인용한 헤겔의 서술은 각각의 문장에서 의미가 이 글에서 말한대로 읽어야 하는 대목을 정확하게 찝어내서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위에 인용한 일상언어에서의 논리 구조를 헤겔 서술에다가도 적용하면 체험자(인식자)의 체험에 동감하고, 그 체험을 야기한 다른 누군가를 혼내켜주는 것과 같이 읽힐 것 같애요.
제가 알기로 이러한 이해는 1990년대까지는 한국에서 국어시간에서도 가르치는 경우가 있었다고 아는데요. 국어는 문학적이라, 외연에 결부된 내포를 더 자유롭게 판단하는게 되지만, 철학은 정확함, 엄밀함이라는 전제가 되고나면 내포를 극도로 자제하고 외현을 더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어서, 주어 생략에 대해 이 글에서 말하려는 독법으로 읽는게 잘 생각이 도달하지 않은 듯보입니다.
“감각적인 것, 통속적인 것, 개별적인 것에 함몰되어 있는 상황으로부터 사람을 구출해내고 그들의 시선을 들어 올려 별을 향하도록 만들려는 힘겹고도 거의 열성적이며 흥분 상태로까지 나타나는 노력은 바로 이런 요구에 부응한다. 마치 사람들이 신적인 것을 모조리 망각한 채 버러지마냥 먼지와 물로 흡족해하면서 한군데에 머물러 있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 난국을 적용한 사람에게 적용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풍부한 사고들과 형상들로 가득 찬 광활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것을 천상과 연결해주는 빛줄기에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빛줄기를 따라서 그들의 시선은 차안의 현전에 안주하는 대신에 이를 뛰어넘어 신적 본질을 향해, 말하자면 피안의 현전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다. 그래서 정신의 눈으로 하여금 지상의 것을 향하도록 만들고서 그것에 고정되게끔 강제되어야만 했다.” = 난국을 체험한 사람에게 적용
“그리하여 오직 천상의 것만이 지녔던 명징함을 현세의 감각이 빠져 있던 둔탁함과 혼란스러움 안으로 이입시켜서 현전하는 것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 즉 경험이라고 불리는 것이 흥미로우면서도 타당한 일이 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소요되었다.ㅡ그런데 이제는 정반대의 곤경이 앞에 놓여있는 듯이 보인다. 즉, 감각이 지상의 것에 너무나 고착되어 있어서, 감각을 그 너머로 고양하려면 예전 못지 않은 폭력이 필요한 듯하다. 마치 사막에서 방랑자가 한 모금의 물을 갈망하듯이, 정신은 그저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적인 것에 대한 보잘것없는 감정만이라도 갈구하는 듯이 보일 만큼 빈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정신이 무엇에 만족하는지에 따라서 곧 정신이 겪은 상실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 난국을 적용한 사람에게 적용
“그러나 이처럼 받는 데에 쉽게 만족하고 주는 데에 인색한 태도는 학문에 어울리지 않는다. 감화만을 구하면서 지상에 있는 현존재와 사고의 다양성을 안개로 감추어버리고는 막연한 신성에 대한 막연한 향유를 추구하는 자가 이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곳을 잘 살펴보면 무언가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 으스댈 수 있는 수단을 쉽게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철학은 이처럼 감화되려는 태도를 경계해야만 한다.” = 난국을 적용한 사람에게 적용
이런 이해처럼 한단락에서 주어 관계가 명확하게 외현으로 안나와도 내포를 각기 다른 주어로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인용문이 길고 맥락이 생략되어 이해는 되시더라도 아주 확 와닿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핵심은 일상언어적으로 역동적인 측면에 의해 체험자(인식자)의 말에서 주어가 생략되어 앞과 뒤의 술어의 적용이 체험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을 잘 분별해서 생각할 줄 알듯이, 헤겔의 논증에서도 같은 구조를 읽어낸다면 후설이 개선 요구한 것을 헤겔주의자분들이 잘 수용해서 함께 하는게 된다는 것이죠. 존재 의의 보존이 공통점이라 그렇습니다.
독일어 원문은 확인을 안했네요 ㅡㅡ;; 원문이 주어가 명확하게 나온다해도 타대목들에서 저의 이해대로 헤겔을 읽으면 구명 지향적이게 되서 후설 비판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 두번째로 인용된 두단락의 글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나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