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중국 왕조는 환관을 기용했는데 그 수는 왕조마다 달랐다. 당나라때는 환관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그 이유는 조정에서 공납으로 매년 환관으로 기용할 사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환관은 요청되기도 했고 스스로 자원하기도 했다. 송대에 와서는 자원해서 환관이 되는 것을 막기도 했다. 송대의 치세가 외적들의 침략이 잦아 병역을 담당하는 인구가 중요했어서 허가되지 않으면 남자로서 스스로 자원한 사람을 환관으로 허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송대에는 궁궐에 매우 적은 수의 사람만 환관으로 두어 환관 수를 대폭 줄였으며 이로 인해 재상의 권한이 커져서 정치가 정상적으로 운용되었다.
그러나 송나라때에도 환관의 국정농단이 여전해서 마지막 황제에게 신임받은 환관의 말만 듣고 전쟁을 일으켰다가 왕조가 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중국 왕조의 패턴은 왕조 세움 → 태조 사망 → 암투 → 환관으로 견제 → 망국으로 이어지는 일치일난의 순환 체계였다. 여기에 지방 호족이나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을 기용하는 사례가 많아서 환관은 중국 고대 역사에서 흥미로운 권력 다툼의 주제가 된다. 후한 말기처럼 황태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외척과 호족들을 견제하려고 환관의 세력이 강해진 시절에도 일치일난의 원인으로 된 환관의 정치 개입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이들은 출세를 위해 궁에 들어와왔으므로 환관은 출세욕의 상징이기도 했다. 미천한 집안 출신의 남자가 출세하는 길이었다. 남성 기능을 상실한다는 매우 큰 손실에도 불구하고 출세를 위해 환관이 되려고 하는 사람이 많았다. 환관이 되어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 당연히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되었고, 출세를 안하더라도 봉급으로 살아가는 것이 풍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허락없이 스스로 된 경우는 불효자로 다스렸다. 반대로 부모가 나서서 환관으로 삼으면 발각되기도 했다.
때로는 결혼한 사람이 환관이 되기도 했다. 이 경우에는 풍족한 급료로 가족이 부유해지기도 했고 본인도 일생이 좋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거세를 스스로 한 경우, 시술이 잘못되어 자살하기도 했다.
환관은 남성 기능의 상실이 필수였지만 출세가 되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미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자주 지원을 했다. 이 중에서는 현명하게 역할을 수행한 사람도 있었고 그 반대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왕조의 존속도 위협했다. 출세욕이 그 기반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