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은 현상학뿐아니라 해석학과 분석철학, 포스트모더니즘에서도 주목하는 철학적 논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접하는 거의 모든 사태는 현상이죠. 마라토너가 42.195km를 달려서 스타디움에 들어서는 순간도 현상이고 어린이가 서프라~이즈와 같은 생일축하를 받는 것도 현상이고 동수가 목이 말라 주방에 와서 물을 마시는 것도 현상입니다. 현상은 그자체로 나타나는 객관적인 특징이 있는데요. 어떤 이유에 의해 조건이 되면 현상에 대한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 어떤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현상에 대한 해석 기준을 만드네요. 대체적으로 특정한 해석 기준을 따르면 늘 그런 것은 아니더라도 특정한 인식에 이르게 됩니다.
이 해석 기준과 특정한 인식에서 관점이 형성되네요. 현상은 비슷한 동연성이기도 한데, 해석 기준에 따라 특정한 인식에 이르게 된다면 어떤 인식인가?의 논제가 어느 세상의 구조에서든 있게 됩니다.
분석철학적으로 우선 보자면요. 현상은 일단 연장적인데, 서로 다르게 현전할 수도 있고 서로 비슷하게 동연적이기도 하죠. 이 판단 조건에는 시간성이나 인과성이 조건이 되구요. 동수가 목이 말라 주방에 와서 물을 마실때 이에 대한 판단은 시간성이나 인과성의 조건에 의해 결정되게 됩니다. 예를 들면 갈증이라는 현상에 대해 의학적으로 볼 수도 있고 갈증의 의미 연쇄로 볼 수도 있는데요. 이 해석 기준은 시대 흐름에 따라 형성되기도 하고 관습적으로 상당히 균일한 양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판단자의 그때마다의 심리상태에 따라서도 달라지기도 하네요. 이 심리상태의 의의 보존에서 현상에 대한 해석 기조에 다들 관심을 두는 것 같습니다.
현상에 대한 이해와 실행은 시간과 인과에 대한 이해에 의해 결정되는 무엇이네요. 이 시간과 인과는 크립키로 보면 고정적으로 지시되는 이름의 주인이 지나온 일대기이고, 때로는 흄이 말한 인과는 존재하지만 사건들의 연쇄는 단지 인접한 현상의 연접이라고 할 수도 있네요. 그러나 이러한 것은 그의 일대기를 관찰한 사람의 관점에서 그러한 것이고, 현상의 당사자는 여러 해동안 난국이 해결되지 않고 실존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네요.
이 실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외부인이 보면 현상일뿐이지만 실존적 주체의 내적 관점에서 보면 의식에 나타난 것, 불현듯 마주친 무엇이 되구요. 이 불현듯 마주친 무엇이 시간계열로 언어화되어 이해될때 늘 그러한 것이 되네요. 그래서 현상학은 외부인의 관점에서 볼때의 현상과 실존적 주체의 내적 관점에서 볼때의 의식의 이해를 학문적으로 정초하려고 하죠. 사르트르가 특히 그러합니다. 시선과 응시의 문제, 수치심, 결핍, 무화작용, 의미 연쇄 등의 개념이 그러합니다. 특히 한계 상황에 처한 실존적 기투나 자유의 제한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하이데거는 살아진 경험이나 존재자의 삶을 이론으로부터도 긍정해주는 논의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구요. 근면한 일꾼의 구두에서도 보여지는 삶의 태도를 권장하고 이를 지켜내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던 것 같애요. 존재자에 대한 관점을 주는 존재에 대한 논구도 그래서 되는 것이죠.
후설은 노에마와 노에시스의 분별에 대한 제안으로 요약해봅니다. 우리가 현상을 보고 무엇을 사고해야 하고 무엇이 사고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하면 현상적으로 실존적인 이해가 가능함을 논의한 것 같애요. 모든 것은 현전해야 알 수 있다면 의식도 현상적 현전이고 외부 사태도 현상적 현전일 것이구요. 노에마와 노에시스에 대한 옳은 인식에 이르게 되면 현상에 대한 이해가 된다는 창조력 있는 발상이네요.
일단 제 표현대로 기술했는데 저서를 확인하면 저서에 나온 표준적 표현으로 기술이 될 것 같습니다 ^^;;
맥도웰이 분석철학적 전통에서 논구를 했지만 헤겔적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지금 인상은 칸트의 인식론적 논의에서 자발성, 감응성 등의 논구를 하는 배경 동기가 인식 주체의 무기력함이나 인생의 난국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보는게 아니라 인식적인 조건을 살펴서 인식 주체의 삶에 좋은 동기를 부여하려는 것과 같아서 같애요. 헤겔과 셀라스에 있어 칸트적인 테마라는 저술에서 감각지각이 지닐 수 있는 개념적 능력을 예로 들어 논구하는데요. 여기서도 감각지각이 감응적이라면 개념적 능력을 잘 발현할때 자발적인 인식이 가능해진다는 의미로 통용되죠. 현상에 대한 대응이나 해석도 감각지각으로부터 세계의 사태를 감각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발전시켜가는 것이 그 해석 기준이 되는데요. 분야는 달라도 현상학과 분석철학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게 되서 이 역시도 현상학과 분석철학의 관련성 탐구에 근거가 되는 것 같애요.
맥도웰을 예로 들었지만 타철학자들도 명시적으로는 아니더라도 각자의 이론적 논구 배경이 서로 조화로움이 되는 경우가 있구요. 맥도웰은 직접적으로 저서에서 말합니다. 지금 주목된 그의 개념은 actualization of conceptual capacity이구요. 제 예측은 이 능력을 개발해서 헤겔의 절대지에 도달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현상학자들도 이를 지지하죠. 맥도웰도 저 개념을 직접 언급하듯이 이 능력이 합리성(rationality)와 연관점이 있다는 논의를 하고 있구요. 해당 챕터의 제목 자체가 Kantian Themes in Hegel and Sellars 입니다. 이보다 더 많은 개념들이 나오는데 이들의 실존적 구조는 현상학과 통용될 수 있는 것으로 직관합니다. 이 논구에서 달리 볼때의 위험성을 맥도웰은 concept of danger is in play in any awareness로 보는데요. 현상학에서도 논의되는 양지 개념과 현상에 대해 옳은 방식의 이해가 중요하다는 것과 통하는 것 같애요. 개념적으로 진리가 존재하지만, 어떠한 인식이나 옳은 것은 아니다. 이런 의미. 동물과 인류의 차이점도 언급하구요. 서구에서 현상학적으로 보호받기 이전의 존재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상식에 대해서도 위의 핵심 원리에 의해 해설이 되네요. 분석철학적이라 후설과 분야는 달라도 진리에 대한 옳은 판단에 대해 헤겔을 참고해서 말합니다. 지양하라!에서의 지양 개념 또한 여러 인식 주체의 상호작용에서 참이 되구요. 이 의미에서 맥도웰이 헤겔적이라고 하네요.
크립키가 제시한 고정지시어 이론에서 허구적(fictional)인 것과 유령적(ghostly)인 것의 구분도 인식 주체에 대한 연민과 배려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네요. 시대가 바뀌어 여러 방면에서 쏟아져오는 인생에 대한 관점들이나 구닥다리처럼 보이는 성탄절의 성경영화를 보고 어린이가 악몽을 꾼다면, 이는 허구적인 것에 의해 불러일으켜진 유령적인 것이지만, 친지들이 이를 알고 서프라~이즈와 같은 생일잔치를 해주었다면 어린이가 접한 현상은 결국에는 그에게 좋은 영향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30년간 공공적인 파급이 있었을때 신방과 분들이 어려움을 겪듯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간다고 보인다면 허구적인 것과 유령적인 것에 대한 인식은 인류의 보편정신에 의해 이해가 되고 이로부터 현상이 현전하는 의식이 이해가 될 것 같애요.
현상학도 이론적으로 해야만 하는 논의 체계를 보고 이해가 안될때 이 글에서 말한 것과 같이 합리적 직관으로 표명해보고 들어가면 잘 안보이던 의미가 이해될 것입니다.
일단은 이런 기조구요. 이보다 정식적인 현상학적인 해설은 공부가 진행되면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