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들은 군주로서 위엄을 가지고 정무를 본다. 군주의 권위가 강하고 제대로 작동하면 그 위세가 넓은 중국 대륙 전체를 호령한다. 왕조를 새롭게 열은 황제들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두루 경험한 인물이라 절대적인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인해 젊은 나이에 죽으면 후대의 황제는 어려서 유약하게 된다. 중국 왕조에서 흔히 발견되는 패턴이지만, 태조의 죽음 → 어린 황제의 등극 → 황후의 수렴청정 → 외척의 득세 → 황제의 성장 → 환관과 협력하여 외척 척결 → 황권 강화 → 어린 황제 등극 → … 의 흐름이 이어지게 되었다.
이런 황제의 권력을 직접 보필하는 역할을 환관이 맡았으므로, 그들은 황제의 권위에 편승하여 대사를 좌지우지 하기도 했다. 역사에 길이 남는 업적을 남긴 채륜이나 사마천 같은 경우를 제외하면 환관은 군주정치에 비하는 환관정치의 당사자이기도 했다. 어린 황제와의 친밀도에 힘입어 환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발호할 기회가 많았다는 뜻이다.
어린 황제는 어리석기도 해서 환관들에게 정사를 일임하고 환관들의 전횡을 사실상 허용하기도 했다. 삼국지연의 서두에 나오는 십상시들도 이러한 예에 속한다. 영제는 그당시 어려서 환관들에 의존했는데 십상시의 수장인 장양을 아버지, 부수장인 조충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신임했다. 이들은 부패하여 매관매직을 일삼고 벼슬을 주어 임기가 보장되지 않아서 본전뽑는다는 생각으로 백성을 수탈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건적의 난과 같은 수많은 난이 발생한다.
이들의 횡포가 도를 넘자 후한 말기 대장군 하진은 환관을 제거하여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살해된다. 하진의 부하가 다시 군사를 동원하는데 환관은 나이어린 황제를 업고 도망한다. 이 이야기도 삼국지연의에 나온다.
황제와 환관은 긍정적인 의미에서 친밀하기도 했다. 궁궐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지내다보니 서로가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다. 비서실장처럼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면서 서로의 비밀도 털어놓는 관계가 되고 큰 일을 상의하기도 하게 된다. 황제는 고독하고 환관은 후대를 못이었으므로 고독했다.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어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지방이나 관리를 감시하는 동창이 생성된 왕조에서는 군주정치의 지속에도 환관들이 중책을 맡았다.
명대 마지막 황제 승정제가 이자성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그 주변에는 보호해줄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그는 자살하는데, 이때 따라 죽은 사람은 단 한명의 환관이었다는 일화에서 황제와 환관은 죽음도 함께 하는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친밀도가 호족이나 재상, 사대부들의 권세가 쎄지는 것을 막는 견제 장치로도 작용했다. 한고조 유방이나 명태조 주원장은 즉위 후 자기 수하의 사람들을 도살한다. 재상을 부활시키지 말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그래서 황제의 후손들은 재상을 두지 않기도 했으나 환관에게는 제한을 가하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측근세력으로서 환관은 한제국 성립시기에도 군주와 친밀하고 긴밀한 관계였다. 환관은 외척 견제 세력이었고 황제를 보필했다. 후족과 혼인해서 맺어진 세력 균형은 황제가 죽고나면 외척의 대두로 이어져서 문제였다. 어린 황제는 외척 대항 세력으로 환관을 기용하였고 이는 성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환관의 세도가 강해지면서 폐단도 있었는데 일족이나 양자를 중용하기도 하고 호족과 결탁하기도 했다. 뇌물을 받고 매관매직을 일삼고 부폐한 권력을 독점해서 전횡을 일삼고 발호가 극에 달했다. 당고의 화 사건에서도 드러나듯이 강직한 지식인을 탄압하고 정치에 간섭한다. 매관매직한 관리들은 백성을 수탈한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난이 일어나서 이를 해결할 무인세력이 대두된다. 삼국지연의 서두에 나오는 군웅할거의 시대가 온 것은 알고보면 환관의 전횡이었고 이는 황제와의 친밀도에서 유래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