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관적 관념론, 객관적 관념론, 선험적 관념론에서 개념의 역할

저도 관심권에 있는 주제라 저의 의견을 말해보겠습니다.

주관적 관념론이 관념론으로 지칭되었으나 버클리 또한 개념을 토대로 논증합니다. 하지만 의미를 재정의 하는데 있어 비판하는 이론의 구심점이 되었던 수학에 대한 반론처럼도 이해되었고 버클리가 진행한 로크에 대한 비판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 선 사람을 공격했다는 식으로도 이해됩니다. 이 경우 버클리를 옹호하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우리와 동시대 철학자도 있는데 이러한 전제 하에 즉 버클리를 그의 의도대로 읽는 철학자도 있다는 전제 하에 버클리의 원전을 읽어보면 그의 마음 상태가 만물을 결정한다는 말이 생각보다 거짓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하지만 스크루턴이 말하듯이 너무 솔직한 면은 있다고도 느껴집니다. 그의 인식론 주저 앞부분에 헌정사 자리에 온 문구를 읽어보면 종교인으로서 과학을 비판하는 듯한 문구가 나오는데 그가 경험론자로 분류되는 이유가, 특정 이론에 대한 판단에 있어 종교의 이해심이 과학의 객관성보다 더 인식론적으로 뛰어나다고 본 것 같구요. 이 경우 이론적으로 논의된 바가 상황에 따라 각자의 주관 즉 마음 상태에 의해 구성되어 존재하게 되기에 이를 논의한 것인데, 운이 나쁜건지, 아니면 그의 비판이 너무 앞서가서 수학에 대한 반론으로 이어진 것이 그런건지 헤겔이나 셸링 말고도, 사르트르 또한 구명적인 존재론을 제시할때 버클리처럼 안해야 한다고 언급합니다. 버클리가 같은 경험론자로 인지심리학자들에게서도 인정받는 로크에 비해 주관적이라고 된 이유는 그가 로크가 구별한 1, 2차 성질에 대한 일반어가 가능하다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해서인데, 그 가타부타보다는 개념적으로 인정가능한 토대는 지속하면서 경험의 자리를 있게 하는게 더욱 더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스크루턴이 솔직함 언급을 한 것 같애요.

객관적 관념론이나 선험적 관념론도 결국 안받아들이면 그만이긴 합니다. 그러나 발전적으로 해석하면 NNN님이 해설하셨듯이 실재를 정식적으로 포착한다는 것의 기반이 개념이고, 선험적 관념론도 물론 실재 대상을 정확하게 포착이 안되더라도 개념으로 가능하다는 것인데, 인식자의 관념적 능력에 대한 것으로 일반어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미세한 차이는 있더라도 각자가 제작한 세계관이나 현상에 대한 이해가 될 수 있게 됩니다. 이를 조금 약화시켜 객관적으로 말하면 상호주관적 이해가 되는 것이고, 강하게 하면 어느 교수님이 지지하시듯이 경험독립적인 것의 존재를 말하면 되는 것인데, 이를 현상학자나 객관적 관념론자들은 경험독립성을 인정하는게 개념적으로 같지만, 그 시원이나 개념적 상정에 대해서는 경험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고 할 것 같애요.

버클리가 종교인이라 그런지 마음을 강조해도 종교적 신앙은 훼손이 안된다고 하는 판단 아래 마음 상태를 강조한 것 같습니다. 실재로 신 존재에 대해서도 근거짓는 대목이 있던데 지금 원전을 찾으려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그런데 상호주관성이라고 이해하게 되면 완전한 이해가 아니라는 인식도 있어서, 실재를 정신적으로 포착하는게 문제가 되는데요. 개념적으로 포착한다는게 해결의 실마리입니다. 주관적 관념론은 이 개념 형성에도 마음 상태가 개입되니, 아무리 일반적인 일반어가 제시되도 결국 마음이 지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인데요. 이게 통하는 사태특정은 이런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먹방러 재수없다”라고 하는 이해는 결국 마음이 지각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경우 칸트가 말한 선험적 객관론이 말하는 것은 “실재는 주체의 관념 너머에 닿을 수 없이 존재한다”라고 할 것이고 버클리는 “모든 외부 대상은 마음이 지각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라고 한 것입니다. 객관적 관념론은 그럼에도 이러한 이해를 지양하는 이해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객관화된 기반을 따를때 가능하다라고 보고 모든 것이 마음 상태만은 아니라고 할 것 같애요.

PC 사양을 예로 들면 Core i5 의 코드네임별로 사양이 정해져 있고 객관적인 벤치마크 수치가 주어집니다. 이게 실재입니다. 그런데 사용자들은 각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르게 지각합니다. 체감 속도가 각자 다르죠. 이에 대해 로크가 제1성질, 제2성질의 구분을 해서 실재 대상의 객관적 속성과 체감 속도가 자리하는 성질의 범주를 구획했다면 버클리는 이러한 성질 구별도 자의적이 될 수 있다고 비판했는데, 로크의 경우 마음의 추상을 개념화했어도 일반어의 공통감을 인정했다면, 버클리는 이역시도 비판해서 주관적 관념론으로 이해됩니다. 즉 일반어의 공통감이 존재하고 지켜지면 되는 것인데 이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래서 관념의 의의를 높게 쳐주는 이론들도 버클리를 비판하고 개념을 중요하게 상정하는 것 같애요. 3인칭이 객관적인 것이고 1인칭이 관념이지만, 일반어에 대한 옳은 체현을 한 논자라는 것이 일단 인정되면 관념을 말하더라도 객관성을 담지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요. 칸트는 이에 대해 개념과 경험독립성을 인정해두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식 주체가 늘 오류없이 대상을 인식할 수는 없다고 보고 물자체 구분을 한 것 같애요. 그래도 칸트처럼 일반어와 개념을 잘 채택할 수 있다면 객관성은 있게 되고, 단지 어떤 누구한테라도 모든 동의를 얻을 수는 없어도 동의를 하도록 요청하는 것은 가능한 것 이정도로 이해하게 되더군요. 개념에 대한 능력이 있으면 해법이 된다는 의미 같습니다. 상호주관성, 공통감, 일반어, 객관적 인식, 마음 상태, 이런게 다 개념을 잘 쓰는 것을 체현한다면 선험적이고 객관적이라는 결론이죠.


참고로 제1성질과 제2성질에는 CPU 사양과 체감 속도는 안나오지만 이에 대해 규범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분류적으로 해석하면, 로크의 구분을 발전적으로 해석한게 됩니다. 즉 제1, 제2성질 구별의 이론적 의도를 알고 현대화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어느 교수님에 의한 학파분들은 어떻게 제1성질, 제2성질에 체감 속도가 나오냐고 하시면서 태클거는 경우를 봐서 언급합니다) 로크가 구분한 성질 구분이 초기의 시도로서 의미가 주어지는 것인데 버클리가 이를 비판한 것은 성질 간 구분점이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의의와 다르게 이해되기도 한다는 것인데요. 학자들은 이에 대해 로크가 한 시도의 의의가 인정되지만 그당시 이론적 한계 (실측의 어려움) 에 의한 것이라 이에 대해 현대화한 예시를 하기도 하던데요. Core i5와 체감 성능에 대한 구분은 제가 이런 의도로 제시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예시 참고 전에 든 예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여전히 판단자의 자율에 맞겨집니다. 경험독립성에 대한 유난한 강조가 쓰이는 실천적 상황이 무엇인가? 오류가 가능하다는 언급에 대한 오독은 아닌가?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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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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