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것의 윤리학

우리가 지능을 가진 인류인 한, 태어나서 늙어 소멸할때까지 의미를 찾아 구체화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을 끊임없이 하고 또 하는 것이 건강한 삶이다. 그냥 먹고 자고 놀고 그러는 것만으로는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누구나 대상을 향하여 의식 작용을 하는 것이 삶이고 의욕적인 것이다. 그런데 의욕이 어떠해야 하는가의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의미 부여를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의욕적으로 의미를 구체화하고 부여하는 것도 이런 의욕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의미 부여의 의욕이기도 한데 이를 한층 더 높은 경지에서 보는 윤리학의 관점이 대두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리학은 어떤 분야인가? 인류의 지적인 인식이나 행동에 대한 평가를 하는 학문이다. 한층 더 높은 경지에서 현상적인 것을 한발짝 뒤로 물러나 그 인식이나 행동이 지닌 좋고 나쁨의 평가를 하는 학문인 것이다. 친구들과 밥먹으러 가서 소주 한잔할때 의사 선생님이 음주는 금물이라고 한 것을 어기고 소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은 윤리적이기는 한데 의학적인 기준에 의해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한국이 무기를 지원해주어야 하는가에 대한 사안은 아주 힘든 지성적인 검토가 필요한 사안이다. 우크라이나를 도와야 하는 당위가 있고 인접국가와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당위도 있다. 국제 사회의 정의를 따라야 하고 자국의 이해관계도 따라야 한다. 현실세계의 문제들은 이런 윤리적 가치들이 충돌해서 있게 되는 스케일의 차이인 선택의 사안들이다. 무엇이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의 문제가 일으켜지는 지점이다.

이런 사안들을 검토하고 답변을 제공하는 학문을 좋은 것의 윤리학이라고 해보자. 좋은 것은 무엇인가? 이는 윤리학적인 질문일때 좋음과 해야 하는 것의 물음을 제기하는 질문이라고 이해해볼 수 있다. 그러면 우선 좋음의 정의가 필요한데, 좋음이라는 말이 지닌 대언적인 포괄성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을 하나로 통합하기가 힘들기도 한 말이다. 대물적으로 우리는 좋음이라는 말의 실재적 예화가 다양해서 예화를 살펴보다보면 한 기준을 세웠어도 다른 기준에 의하면 전혀 다른 결론으로 이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앞서 말한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것은 부당한 침략을 당한 국가에게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UN의 원칙에 의거해서 우리가 도와야 한다는 것도 기준이고 객관적인 조건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인접국가이고 국가안보에 협력을 해야하는 장기적 안목에서 보면 자국의 이해관계에 상충되는 것을 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여러 가치들이 충돌하는 이런 상황에서 주요 개념은 윤리학의 좋고 나쁨은 분쟁이나 편가르기와 같은 현실적 보조 전제에 의해 그 답변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국가간의 일이 아닌 국가 내부의 일에도 주의를 돌려보자.

한창 사회분위기가 포스트모던한 이론에 대한 동감을 얻어가는 시대에 이문열 작가가 주장한 수사법적인 표현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직격탄을 날려서 이문열 작가는 한동안 보이콧도 받게 되었다. 이는 논객끼리의 흔한 토론이라기보다 정치적 진영의 서로 다른 일로 비화되기도 했다. 이 경우 좋음이라는 결론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정치적 진영이 서로 다른 기준에서 각자를 정당화하고 있고 서로 합당하다고 하는 명분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좋음 = 지각적인 인상에 의한 사고라는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정치적 진영이라는 보조 조건이 있으니, 정치의 특징인 합리적 판단 외에도 감성에 의존하는 동기가 있다. 여기에 수사법적인 표현에 대한 은유적인 측면은 감성에 의존하는 동기와 맞물려서 세상 흉흉해지기도 하는 현상을 결과했다. 라캉주의 사회비평가도 지적하듯이 인상비평이라는 것이 한동안 시대의 유행어가 되기도 했으며, 이러한 논의로 있게 되는 수혜는 개인마다 다른 정도로 다가왔을 것이다. 즉 시대정신은 좋은 것인가로 보면 군중심리로 이어질 개연성이 있고 인플루언서의 발언에 대한 견제 논리로 보면 시대정신이 좋다는 것으로 된다. 이 경우에 보조 조건과 결정 조건으로 분류해보면 판단 조건들이 일목요연하게 될 것이다.

문제의식. 사회적인 사안에 대한 윤리적 좋음이란 무엇인가?

보조 조건1. 역사적으로 있던 부정의는 심판되어야 한다.

보조 조건2.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이 한 일들은 그 당 전체의 잘못이다.

보조 조건3. 이것이 나라냐와 같은 한탄은 정치의 잘못이다.

보조 조건4. 정치인과 행정가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

보조 조건n….

결정 조건. 나라를 분열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조건을 정리해보면 사회적인 사안에서 윤리적으로 좋은 것은 나라 분열을 막는 일이다. 이에 대해 표현이나 은유적인 소통 문법이 주는 제한점을 누구나 느낄 수 있기에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표현을 억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지만, 2000년대 이후부터는 (DJ.DOC의 노래가 상징적이다) 누구나 발언할 수 있고 학생들의 유행어도 인정해주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러면 이문열의 비유는 잘못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시대상의 처리 차이라고 하기에는 불공평한 것 같다. 이문열의 글이 워낙에 차분하고 논조가 있기에 조금이라도 강한 표현이 나오면 인상비평이 적용된 것 같다. 시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잣대가 달라진다는 것은 특정 계층이 오히려 약점처럼 되는 메커니즘과 만난다. 특히 어느 진영이든 대통령이 되면 대통령의 임기나 임기후에 어떤 처벌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리더라고 하더라도 무조건 책임에 응해야 하는가의 논제는 인상비평의 메커니즘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이는 사회통념이라는 것이 실재 대상에 정합적이기만 한게 아니라 개념 위계로 현실따로 인식(언어)따로가 되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기저의 근거는 말보다 글에 대한 반대 인식이 더 강하다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로 인해 이문열 작가에 대한 비판이 하나의 패러다임이 된다고 본다.

좋은 것이란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인가? 개념적으로 명징하더라도 사용 방식에 의해 달라진다는 의견도 있다. 이문열 작가의 언어 사용 방식과 강준만 교수의 언어 사용방식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두 사람이 의견을 같이 할 수 있는 지점은 없는가? 즉 나라를 분열하는 행위는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게 결정 조건이라면 두 논객이 지닌 나라 사랑은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정치적인 진영이 다르다보니 주목한 사안이 다른 것뿐이지 않을까?

좋은 것의 윤리학이라는 것이 성립하려면 두 논객이 실재로는 서로 부딪히지 않아도 되는 조건 즉 위기 상황이나 한계 상황에 처하지 않음에서도 보조 조건이 성립하므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결론도 가능해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절필 선언이라는 것이 이어지기 쉬운 논객끼리의 논쟁에서도 하나의 방안이 되는데, 정치적인 사안에서는 양비론이 안된다는 믿음으로 이어질때 어부지리로 인상비평의 유행이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세상 모든 것은 이어져 있어서 한 사례에서 얻은 윤리적 지식이 다른 상황으로도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좋은 것의 윤리학에서는 은유적인 것의 원리를 따져봐야 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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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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