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과 믿는체하기에 대한 해석

우리는 예술작품을 대할때 일차적으로는 공감적인 감상을 하고 때로는 대상적이거나 평가적이거나 인지적인 감상도 합니다. 예술작품에 공감했다는 것은 예술작품이 구현한 표면, 재현, 의미, 감정, 인과 등의 구현 내용에 찬성하고 특별한 인식의 경험을 했다는 것인데요. 공감이라는 예술 경험과, 대상적이거나 평가적이거나 인지적인 감상들 (서로 연관은 있으나 독립적이기도 하고 복합적이기도 한 감상 모드들) 은 그 해석 결과는 다르더라도 일단 믿는체하기의 태도에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믿지는 않더라도 예술작품의 이해에 관련해서 믿는체하기의 믿음과 태도가 필함되는 활동이라는 것이죠.

예술작품의 세부에 따라 믿는체하기가 유발하는 감상의 모드가 달라질 것입니다. 예술작품은 허구지만 대상적으로 구현된 장르나 기법에 따라 감상에 대한 평가적인 속성이 달라집니다. 그림을 보면 실재물과 닮은 형상이 있고 이를 보면서 믿는체하기 상상을 하는 경우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의 서술을 보면서 믿는체하기 상상을 하는 경우는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떠한 예술작품이든 그 대상을 보는 것은 허구 세계에서 참이고 예술가와 감상자의 참여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장르나 기법에 따라 감상에 대한 세부적인 속성은 분기가 됩니다.

그림은 외적 형태의 모방물입니다. 추상화법처럼 형태와 색채를 이그러트린 기법이 아니라면 사실적인 모사물이 현실 대상과 같기에 그림에 나온 사람에 대한 인상과 같은 경험을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받은 것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회화를 보는 것이 그 예입니다. 그림에 나온 사람이 실재적이라는 것은 허구적으로 참이지만 기법의 사실성에 의해서는 사물이 실재로 있음을 상상하게 하는 사실성이 추가됩니다. 역사가 주제적으로 참이라서입니다. 반대로 역사를 그린 회화가 아니더라도 같은데요. 감자먹는 사람들과 같은 회화를 보고 공감적인 감상을 했다면 허구적으로 참이지만 이는 주제적 참일뿐아니라 기법적으로 사실적인 묘사에 의한 것이라 사실적으로 믿는체하기의 한 사례가 되어 다른 기법이나 표현 대상이 다르더라도 인식 구조적으로 한 상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근면함이다”라고 말하면서 감자먹는 사람들의 장면을 손으로 가리켰다면 우리는 이 말에 대해 공감적 모드가 되기 쉽죠.

소설은 회화가 재현되는 묘사(depiction)보다는 문자적으로 의존하는 기술(description)에 의존합니다. 삼국지의 도원결의에 대한 묘사를 보면 우리는 일단 회화의 묘사처럼 즉각적으로 시각적인 현실 대상의 모사보다는 여러겹이 더 걸쳐진 문자를 봅니다. 현전하지 않은 기술 대상을 봤을때 그림보다 허구적 참이라는 평가적이거나 인지적인 감상 모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노동자들의 근면함이다”라고 한 소설을 공감하는 언급을 할때 우리는 그 소설을 직접 읽어보려 하는데 이것이 믿는체하기의 관점에서 장르나 기법의 차이에 의해 일으켜지는 세부적 속성 차이의 일부분이네요.

예술작품의 이해나 미적 경험이라는 것은 허구적인 기반에 있으나, 그림이나 소설을 보는 행동 자체가 상상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인지적으로 보는 경우가 그 예인데요. 예술평론을 배우는 동수가 소설이나 그림을 보는 행동은 공감적일 수도 있고 비판적일 수도 있는 인지적 활동입니다. 이 경우 믿는체하기가 어느 정도나 미적 경험에 관여하는지에 대한 차이로 인해 예술 감상의 특징이 일반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맥락에서 보면 흥부와 놀부의 소설은 허구적 참이지만 미적 경험이 되어 의미 있는 믿는체하기가 됩니다.

그러나 퇴폐소설의 경우 공감적으로 해석하고 인지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상상의 한 속성인 척하기가 적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그노타와 같은 포르노 배우가 동거인을 죽였을때 시체를 촬영한 그림을 보았다면 시체를 봤다는 시각적 행위와, 흥부와 놀부를 보고 제비를 봤다는 행위는 다릅니다. 즉 대상과 대상 사이의 닮음보다는 예술작품을 보는 것과 대상을 보는 것 사이의 닮음의 조건이구요. 지각되는 사물이 존재하는 양상과, 지각 행위 사이에서의 전제에 의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지각되는 사물의 색채, 표면, 기법, 주제성, 장르 등이 객관적으로 주어져 있다면, 믿는체하기의 경우 주관적인 것이 추가되어 허구적 참의 세계에서 성립하는 무엇이 되네요.

흥부와 놀부에서 흥부가 누구인지 아는 것과, 감자먹는 사람들에 나온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는 것은 상상의 범위나 정도에 따라 다르게 되죠. 문자적으로 의존하는 소설인 경우에 흥부는 가난하고 아이들이 많고 등등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감자먹는 사람들과 같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을 보면 우리는 이분들이 누구인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묘사는 즉각적이지만 문자는 시간적입니다. 즉 정보 획득의 순서의 차이에서 문자 서술이 주는 경우와 회화 묘사가 주는 경우에 대해서도 “눈에 먼저 띄는 것”에 대한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 정보 획득의 순서는 기법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에서 15.00023cm 라는 치수를 13.02cm로 착각한다면 큰 실수죠. 감상자의 실재적 회화의 시각 행위는 예술작품의 표면적인 묘사에 대해 그림인 경우 더 정확하게 볼 것을 요구하는 것 같고 소설의 경우 상상하는 자유도가 조금 더 높은 것 같습니다. 추상회화의 경우 이 경계를 허물어트려서 신선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상상과 믿는체하기로 볼때 작품의 기법과 장르가 중요한 또하나의 이유네요.

상상이 현전하는 것이 아닌 것을 현전하게 하는 의식 활동이라고 하죠. 주어진 감각적 대상이 있고 의식에 나타납니다. 의식은 대상을 해석하고 감상하면서 대상적으로 보기도 하고 공감적으로 보기도 할 것이구요. 인지적이거나 평가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직 현전하지 않는 상상의 경험으로 직관적 종합을 하고 삶의 경험 또는 기억에 의해 변형하거나 재창조합니다. 상상은 예술가의 창조력에 감상자가 창의적으로 참여하는 활동일 것입니다. 믿는체하기가 허구적 세계에서 참이라고 할때 예술가의 창조력과 감상자의 창의력은 상상에 의한 것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술작품이 허구라는 것을 알아도 참여하고 즐깁니다. 이 경우에도 상상과 믿는체하기가 주제가 됩니다.

예술작품에 공감했다는 것은 예술작품이 구현한 표면, 재현, 의미, 감정, 인과 등의 구현 내용에 찬성하고 특별한 인식의 경험을 했다는 것입니다. 흥부와 놀부, 감자먹는 사람들, 플레이보이지, 퇴폐소설 등의 각각의 차이를 분석해보면 인식이나 공감에서도 믿는체하기나 척하기와 같은 주제가 필함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흥부는 한 마을에 형님인 놀부와 함께 산다
믿는체하는 경우에 흥부와 놀부라는 믿는체 문장은 사실이다
흥부와 놀부는 실재하는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경우에 각각의 명제를 우리는 참으로 믿지만 전부 참은 아닙니다. 명제들끼리 서로를 부정하기도 하죠. 이 경우에 믿는체하기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 경험에 대한 논제로 장르나 기법과 같은 예술표현과 무엇을 그려냈는가의 주제성에 의해 결정이 되는 것 같습니다.

위 세가지 명제의 역설을 언어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요. 불완전 명제가 그 실마리가 됩니다. 일단 문헌이 구해지면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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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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