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그림은 똑같이 무엇을 의미하려고 한다. 글자라는 매개체에 의해 언어는 지시를 수행하며 그림은 화풍이라는 매개체에 의해 지시를 수행한다. 지시하는 것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 둘은 유사성도 있지만, 의미하는 매개적인 원리에 대해서는 서로 차이점도 있을 것이다. 그둘의 의미론적인 방식은 동연적이기도 하지만, 묘사론적인 방식은 차이가 있다.
우선 언어는 매개체로서 글자에 의해 표시기능을 완수한다.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상황 그자체를 매개체의 형태적 정확성을 통해 그대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반면 그림은 점이나 선, 면, 색상 등에 의해 정확한 사물 묘사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상황 그자체를 그대로 정확하게 즉각적으로 묘사한다.
이런 의미에서 언어의 형태와 그림의 형태는 다르다. 언어의 형태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그림처럼 지시하는 것은 가지고 있으나 글자의 형태 자체가 의미하는 것은 상황 그자체와는 다른 면모가 강하다. 형태를 본떳다고 하는 상형문자의 경우도 그림의 조형적인 정확성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의 묘사 기능은 보다 더 정확한 형태 묘사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언어의 형태적 묘사와 차이가 크다. 이런 차이에 의해 연상적인 것을 불러일으키는 정도에 차이가 있게 되고 이로 인해 해석적/인식적 매커니즘도 일정량 차이가 생기는 것 같다. 그림의 경우 보자마자 그 즉시 의미가 떠오를 것이다. 언어의 경우 보다 더 오랫동안 연상을 거쳐야 될 것 같다.
물론 언어와 그림은 유사성도 있다. 언어와 그림은 똑같이 무엇을 언급하는 내용을 가지고 있고 느낌을 유발하며 감성을 불러오고 무엇보다도 상상적인 의미 작용을 일으킨다. 규약주의자들의 견해처럼 의미 작용을 의도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을 것이다. 그림이나 언어는 둘다 의미를 가진다. 이는 묘사하는 주제가 있게 된다는 것과 같을 것이다. 독자나 감상자는 글이나 그림이 묘사하는 대상에 대해 이해하려고 하며 이에 의해 주제를 이해하게 된다.
또다른 유사성으로 디자인적 요소를 든다. 그림이나 언어나 매개체로서 디자인적 요소를 가질 것이다. 언어는 폰트의 모양, 획수, 시어들의 배치 등에 의해 디자인적 요소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변경은 제한적이다. 그림의 경우 보다 더 자유로운 디자인적 요소로 표현될 수 있다. 점, 선, 면, 구도의 형태, 경계, 윤곽, 모양, 색상, 색조, 컨트라스트 등등의 요소들을 목적에 따라 다양하고 자유롭게 채택해서 표현한다. 이는 시지각적인 지각의 수준에서 보다 더 자유로운 이미지화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그림의 경우가 언어보다 더 구체적인 시각적 재료를 주어지게 함으로써 보다 더 효과적인 상상을 불러오게 할 수 있는 권능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한편 그림의 디자인적 요소들에 주목해본다면 디자인적 요소들은 대상이나 주제를 표현하기 위한 것들로서 이해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대상을 표현하려는 것이고, 대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어떠어떠한 주제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림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미적 대상으로 된 것들이며, 이로 인해 감상자로 하여금 무엇인가를 경험하도록 이끌어주는 예술적 속성을 가지게 된다. 그림의 예술적 속성은 미적 대상이기도 하고, 미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림의 디자인적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림은 미적 경험을 유발시킨다.
다시말해 언어나 그림이 예술성을 지니려면 미적 경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경험의 대상으로서 본다는 것이다. 즉 주제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주제를 이해할 때, 달리 말해 경험의 대상으로 볼 때, 우리는 묘사하는 “사물”을 대상으로 경험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대개는 묘사하는 “주제”를 대상으로 경험하는 것이라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구상 회화의 경우, 사물의 외형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그 사물을 대상으로 해서 사물 그 자체를 경험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포괄적으로 본다면, 그림 전체에 대해서는 사물보다는 그것이 표현하는 주제를 경험한다고해야 옳다. 예컨데 추상 회화에서는 사물 자체를 경험한다기보다는 그 주제를 경험한다고 하는 편이 잘 들어맞는다. 즉 시각적 외형 그대로를 본다고 하는 것보다는 이차적인 주제를 본다고 하는 것이 미적 경험의 의의를 더 잘 살려낸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림이 묘사하는 대상에 대해 이해하려고 할 때 주제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림의 인식적 자질을 살려내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림의 주제라고 하면 그려진 대상 그자체를 의미한다고 보겠으나 의미있는 미적 경험의 대상으로 본다면 사물 그자체보다는 그림이 의미하려고하는 내용으로 간주하는게 옳다. 어떤 특정인의 외형을 보여주기 위해 고안된 초상화의 경우에도 그의 대상적인 면모보다는 그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 필치나 얼굴의 윤곽 같은 요소들은 대상을 표현하기보다는 주제를 표현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대상은 주제와 혼동되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다.
여기까지 쓴 글에서는 개념 구분의 이행이 좀 명확하지 않은데 일단은 서투르게나마 노트정리가 되었으므로 그냥 이대로 두고, 문헌섭렵이 더 진행되는대로 보다 더 선명한 구분을 해보도록 하겠다. 이해는 잘 되게 해두었다고 자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