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예술은 모사의 예술이다. 찍혀진 인물과 실재 인물의 외형은 똑같게 보이는 예술이다. 증명사진의 예에서 드러나듯이 A라는 인물을 찍은 사진은 A라는 사람이 이러이러한 외모라고 실재 대상과의 닮음을 비교하고 확증시키려고 찍는 것이다. 증명사진의 절대닮음이라는 속성은 지각적인 것으로 서로 식별이 불가능하다. 완전히 똑같은 외형으로 찍히면 그 사진은 완전히 A를 찍은 사진이라고 쉽게 구별이 가능하다. 사진은 일차적으로 모사의 예술이기 때문에, 두 사진의 대상이 같은 A를 찍은 사진이 되려면 외형적으로 같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5세때 찍은 사진을 그 사람이 20세가 된 이후에 재차 찍었다면 그것은 그 A라는 사람을 찍은 것일까? A가 나이가 들어 외모에 변화가 왔다면 어떠한가? 사진이 모사의 예술이고 대상과 사진의 재현은 같아야 하므로 우리는 이 사진에 대해 그를 찍은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지각적 식별불가능성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지각적으로 구별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즉 모사적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차원의 개념으로 설명되어야 할 사안인 것이다.
예컨데 5세때 찍은 사진과 20세때 변화한 외모 사이에는 절대적인 닮음은 없을지라도 무엇인가 더 의미있는 예술로서의 속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5세때의 A는 키가 140센티미터였고 얼굴이 갸름했다. 20세때의 A는 키가 180센티미터에 얼굴이 조금 살이 쪄서 전혀 달라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A라는 확고한 정체성으로 자각한다. 이는 그의 주변사람들도 인정하는 그다움을 의미하는 속성이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특정 인물에 대한 대상적 동일성을 보장해주고 있는 중요한 속성이다.
즉 지각적으로 똑같아야만 대상 A를 찍은 사진이라고 하기보다는 눈에 안보이는 속성, 즉 형식적인 동일성이 사진예술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사적인 동일성이 필요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상위차원의 동일성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존슨의 사진이 존슨을 대변함을 근거지우는 것은
(1) 존슨의 모사적 닮음 (대상적 재현의 닮음)
(2) 존슨의 형식적, 해석적 닮음 (형식적 재현의 닮음)
이 두가지로서, 모사적 닮음은 그대로 재현된 것을 의미하고 형식적 닮음은 마음에 표상된 것을 의미한다.
쌍둥이가 닮아서 지각적 구별이 어려워도 식별이 가능한 이유도 정체성이라는 그들의 형식적 측면 때문이다.
만약 단순하게 닮기만 한 것들의 지시성이 의미를 가지려면 두가지 닮은 대상이 정확하게 공유하는 속성이 있는지를 살펴보면 된다. 이 경우 물론 최상위 차원의 전제된 속성은 같은 대상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사안은 사진이 무엇을 모사하느냐도 중요한 관건이 될 수도 있지만, 무엇을 지시하느냐도 중요하고, 외형적으로 절대적인 닮음이 없더라도 같은 대상을 찍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형식과 내러티브를 공유하는 사물을 찍은 사진은 그 사물과 직접 연관된 다른 대상인 A를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로 여겨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예: A의 일기장) 따라서,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재차 찍어도 그를 찍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 경우 (1)과 (2)가 동시에 충족되면 완전한 동일성이고, 그 중 하나만 충족되어도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어떤 사람의 사진을 찍은 사진을 재차 찍은 사진도 그 사람의 정체성이 담겨 있으므로 그 사람을 찍은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대해 형식과 내러티브를 공유하는 작품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