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빌(Alphaville) 1965

알파빌(Alphaville) 1965
감독: 장 뤽 고다르
주연: 에디 콩스탕탱, 안나 카리나

누벨바그 영화 사조를 이끈 고다르 감독의 영화 알파빌(Alphaville, 1965)를 감상했다. 미래의 암울하고 논리일변도의 사회를 그린 영화로, 인간의 따스한 온기가 상실된 사회에서 인간성의 회복에 대한 질문을 묻는 영화다. 작가주의적으로 두드러진 연출과 플랏의 의미는 흥미롭게 다가오며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을 정도로 철학적이기까지 하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이렇다. 외부 세계에서 파견된 첩보원이 임무 수행을 하면서 알게 된 여주인공과 마음을 나누면서 마을을 구원하고 인간됨의 회복을 한다는 어찌보면 단순한, 그러나 가볍지 만은 않은 주제를 다룬다. 작가주의 감독으로 회자되는만큼 구성이 잘 된 영화다. 감독의 데뷔작인 네 멋대로 해라보다 장면의 컷은 비약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개가 빠른 편이라 좋았고 지루하지 않았다.

영화의 주된 상징물은 알파 60라는 인공지능 슈퍼컴퓨터인데 이 컴퓨터의 체제 하에 발생하는 인간 소외가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알파 60가 지배하는 알파빌이라는 이 사회에서 “사랑”이나 “양심”과 같은 단어는 부재하고 있고 그 원인을 가리키는 “왜”라는 질문보다 “왜냐하면”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도록 강요된다. 주민들은 통제의 이유를 묻기보다 그저 믿고 논리적으로만 사고하도록 길들여진다. 언어의 제약이 상징화된 물건은 성경인데, 그들은 사전을 성경이라고 부른다. 이 성경으로 불리우는 경전처럼 된 사전에서 비논리적인 단어는 개정되며 제거된다. 사람들은 언어적으로 제약된 체제 하에서 비모순적인 논리적인 사고만을 하도록 길들여지고 결국에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를 표현하는 표현을 잊은채로 일련번호를 부여받고 계급적 등급으로 나누어져 살아간다. 금지된 행동이나 말을 하면 그는 처형당한다.

플랏 전개 상으로 스토리의 전체상을 알 수 있게 하는 묘사들이 곳곳에 보인다. 특히나 핵심적인 묘사는 처형 장면이다. 수영장에 긴 다이빙대가 놓여져있다. 그위에 처형당하는 사람이 서 있다. 뒤에서 총으로 쏘면 사람은 물에 떨어지고 좀 생뚱맞게 싱크로나이즈를 하는 여성들이 물에 떨어진 사람을 잔인하게 처리한다. 인상깊었던 것은 처형당하기직전에 유언을 하듯 소리쳐 외치는 그들의 마지막 함성이다. 당신들과는 달리 나는 당신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아내의 죽음에 눈물을 흘렸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하는 사내의 외침은 알파빌이라는 동네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질서를 기준으로 사람들의 온기를 거스르고 이유없이 통제하는 삭막한 곳인지 드러내주는 핵심이다.

이 모든 재앙의 출발점은 폰 브라운 박사의 잘못된 신념에서 출발한다. 그는 오로지 논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사고와 행위만을 추구한다. 그가 만든 알파 60이라는 인공지능 슈퍼컴퓨터는 이를 실천하는 괴물이다. 빛으로 사람들을 쬐여 통제하고 사람들에게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외부인들을 감시해서 신문도 직접 한다. 결국 알파 60의 파괴와 폰 브라운 박사의 처치가 영화의 종국을 장식하지만 여기서 나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순기능적이냐 아니냐의 문제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인공지능의 발달이 순기능이냐 아니냐는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이 얼마나 유연하고 혜택적인지의 조건에 달려 있다고 본다. 우리에게 혜택을 얼마나 주는지의 여부에 의해 인공지능에 대한 판단은 이루어진다. 우리는 삶의 형식을 공유하고 체화하는데 도구를 사용하는 입장에서 대상을 내면화하기도 하지만, 그에 종속되도록 설계되고 길들여진다면 인공지능의 순기능은 불가능하다.

알파빌의 주민들은 인공지능과의 관계가 특정 유형으로만 내면화된 그안에 갇힌 거주민들이다. 양심이라는 단어, 사랑, 애정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몸에 숙련될 자질을 갖지만 그러하지 못한다. 이는 알파 60이라는 거대한 인공지능 컴퓨터의 제약이 의도한 것으로 그들에게 있어서 인공지능의 발달은 삶의 형식으로 된 순기능적이지 않은 제약적 조건이 된다. 과학만능의 시대가 도래하면 시적 감수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1과 1의 더하기는 2라는 집합론 교과서에서나 나올법한 무미건조한 형식적 체계가 중요시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는 인공지능이 아무리 잘 구현된다고 하더라도 형식화의 문제가 통제되지 않는다면 일각에서 우려하는 (상상력에 의한 것이더라도) 컴퓨터의 인간 통제가 도래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도 맞물린다.

알파빌의 주민들은 기계와 삶의 형식을 공유한 체화에도 불구하고 그 상호작용은 혜택적이기보다는 재앙적이다. 그들은 왜 그런지 모른채로 기계적인 삷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희망이 있는 것은 과학자들이 모두 그러한 악의를 지닌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며 사회의 자정노력에 의해 체화된 것은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는 것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경우 삶의 형식과 체화라는 주제는 인간의 따스한 온기의 회복이라는 대전제 로 해결국면을 찾게 된다. 여주인공이 잊고 지내던 애정의 단어들을 알게 되면서 시적 감수성으로 인간성의 회복을 자각하듯이 과학기술의 발달 또한 인간의 따스한 온기를 가리킬 때 재앙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알파빌의 주민들은 구원을 받을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체화된 따스함의 공유는 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에도 적용될만하다. 간호를 하는 로봇이나 말동무를 해주는 채팅 프로그램과 같은 사례는 인간성의 회복이 항상 보존될 때 인간 삶의 가능성은 보존되며 과학기술의 발전이 가야할 길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영화 전반에서 보여지는 장소에 대해서도 언급해볼만 하다. 영화 내에서 묘사되는 장소는 1965년 파리의 시내 모습이다. SF 영화라고는 하지만 스타워즈와 같은 형태의 대규모 시설을 따로 만들지 않았꼬 흑백처리된 파리 내부의 건물을 그대로 썼다. 네모 반듯한 건물의 외관이나 나선 모양의 계단은 어떤 의미에서 미래 사회 같기도 하다. 이는 마치 1980년대 후기산업사회와 1990년대초의 정보화사회 진입시기에 2020년만 되어도 우주기지에 사람이 살고 최첨단이 될거라고 예언했던 것이 아직도 실현이 안되었듯이 1965년도의 파리 시내 모습은 그럭저럭 미래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여겨진다. 일반적인 도시의 모습이 무대이지만 친숙하게 보이는 외양의 도시가 사실은 갑갑한 질서의 세계라는 것의 제약성은 특별한 장소의 구분없이 찾아온다는 것의 암시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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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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