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혁명 (2011)

감독 성룡, 장 리
각본 왕싱둥, 천바오광
출연 조문선, 성룡, 강무, 린펑, 왕학기, 지앙 웬리, 여소군, 방조명, 리빙빙, 장쯔이, 쑨춘, 호명, 조안 첸, 메이팅
촬영 마크 윌리엄스
편집 Yang Hongyu
음악 딩웨이
개봉일
2011년 9월 23일(중국)
2011년 9월 29일(홍콩)
시간 125분
국가 중국
언어 중국어, 영어

2011년은 중국 근대사에서 제일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신해혁명 발발 100주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신해혁명은 청나라 말기 지식인 중심으로 결성되었던 공화혁명파들이 청조를 무너트리고 공화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던 혁명으로 대만의 국부라고 불리우는 쑨원의 지휘 하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영화 신해혁명은 이 혁명 사건을 기념하는 플랏으로 되어 있구요. 신해혁명 100주년 기념이기도 하고 감독과 주연을 맡은 성룡의 100번째 출연작으로 의미가 깊습니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전개가 빠르고 긴장감은 덜하지만 신해혁명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고 혁명을 주도한 지휘자들의 활동을 감정선도 더해서 보여주는 구성입니다. 전개가 조금 빠른 편이라 긴장이 이어지다가 해소하는 기존의 역사물보다는 부담없이 볼만한 영화지만 전개가 너무 빠르고, 등장인물들의 감정선도 너무 전시적인 기분도 드네요. 감동보다는 그저 신해혁명의 흐름을 보여주는 정도로만 장점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신해혁명의 기조가 되는 흐름을 잘 보여줘서 역사물 좋아하신다면 시청해볼만합니다.

조문선(자오원쉬안)이라는 쑨원과 똑같은 외모의 중후한 연기자를 고용한게 신기하구요. 성룡은 황싱으로 나옵니다. 쑨원은 광주 출신의 의사이자 혁명가로 일생을 바친 인물이구요. 황싱은 쑨원과 협력해서 군사활동을 지휘한 인물입니다. 두 인물 모두 신해혁명과 공화국 건설에 양대 산맥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라, 영화에서는 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해서 극화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우선 영화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신해혁명과 중화민국 설립이 있기까지의 통사와 각 인물별 생애를 소개해보겠습니다.

19세기 말, 아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중국은 영국에게 굴종적인 문호개방을 한 이래, 서구열강들이 권고한 반식민지적 상태가 되어 종이호랑이로 전락하고 맙니다. 한족 중심이 아닌 변방의 만주족 귀족이 정권을 잡아 지방은 부폐하였고 민중들의 삶은 피폐해져갔습니다. 더욱이 반식민지적 상태가 될때까지 무능했던 청조 황제체제하의 지식인들은 서구 문명을 접하고나서 선진 정치체제의 사회를 꿈꾸게 되죠. 이 지식인들은 사회체제와 정치체제를 바꾸어야 한다는데는 공통점이 있었으나 세부적으로는 달랐습니다. 황제체제를 그대로 지속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군주는 그대로 두되 헌법을 입법하자는 입헌군주파, 그리고 황제체제를 전복하고 공화국으로 나아가자는 공화혁명파가 그 부류들입니다.

혁명파들은 회당을 조성해서 사상적 교류도 하고 자금모금과 봉기기획 등을 하면서 크고작은 봉기를 일으킵니다. 광주 지방에서 특히 이 세력들이 강성했구요. 마침 태평천국의 난과 같은 강성했던 봉기의 근원지라, 이 지역에서 활동한 지식인들은 강한 사회개혁적 의지를 보여줍니다.

1866년 태어난 쑨원이나 1874년에 태어난 황싱은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맞서 혁명을 평생 추구한 인물들로 각자의 지휘 아래 혁명회당을 설립하여 활동을 한 인물들입니다. 명석한 교육배경을 가진 인물들이었구요. 1905년 동맹회 설립후 협력을 하는데, 쑨원이 사상적인 지휘자였다면 황싱은 실천적인 지휘자로 통합니다. 물론 단순화한 이해지만 쑨원이 모금활동, 회당설립, 사상적 입안을 했다면 황싱은 군사작전 지도와 지휘를 했기에 통용되는 말이기도 하네요.

쑨원은 광주 지방에서 태어나서 혁명파적인 기질에 익숙한 아이였습니다. 형제가 운영하던 하와이로 가서 선진 문물을 접하고난 후 중국의 근대화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하와이에서 교육을 받고 광주로 돌아와 강력한 개혁적 성향을 보여, 미신을 믿는 비근대적인 마을 문화에 반항하는 사건도 일으켰다가, 홍콩으로 이주해서 살게 됩니다. 거기서 의사 수업을 받고 개업하는데 하와이에서도 영어를 잘 하던 실력가였고 명석한 학습능력과 훌륭한 인품으로 명의로 이름나게 되네요.

이시기에 혁명에 관심을 두고 흥중회를 설립해서 무장봉기를 논의하게 됩니다. 선진 문물을 접한 광주 출신의 지식인이었기에 그당시 청조 말기의 혼란함을 일소하고 민생안정과 봉건타도의 기치를 내걸은 행보였죠. 흥중회 멤버들은 쑨원과 학창시절부터 교류하던 분들도 많았구요. 다들 믿음으로 이어진 동지애로 혁명봉기를 한다는 일념하에 단결한 비밀단체였습니다. 그당시는 감시체제가 한정된 시대라, 발각만 안되게 조심하면 혁명봉기도 가능한 시대였습니다. 흥중회는 무기조달이나 봉기 비용을 대는 것도 담당했습니다.

제1차 봉기는 1895년 광주에서 일으킨 봉기로, 가담자가 혁명에 투신한 것을 알게 된 가담자의 가족이 밀고하는 바람에 무산되고, 쑨원은 일본으로 탈출하게 됩니다.

이후에도 여러번의 봉기와 실패를 반복하면서 쑨원은 망명 생활과 봉기재건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게 되죠.

일본에서 있다가 영국으로 가서 삼민주의(민권주의, 민족주의, 민생주의)의 윤곽을 세웁니다. 런던 도서관에서 공부한 사회체제에 대해 서양철학적인 개념을 중국 전통 개념인 體와 用으로 그려낸 사상이 독특하죠.

“國家社會는 상호 互助의 體요, 道德과 仁義는 互助의 用이다. 國家는 體이고, 政治는 用이다. 法律은 治의 體이고, 治의 用은 權勢다. 만약 用이 없다면, 體는 存在할 수 없다. 世界에 本質이 있고, 精神의 用을 행하지 않는다면, 人類가 아니다. 또한 物質이 없다면, 精神의 表現은 불가능하다 “

이런 유형의 사상으로, 의사여서 과학적 입안을 강조하면서도 體의 체제적인 의미와 신체로서의 의미를 한 개념 체계로 융합했고, 사회진화론적인 관점에서 정치와 행정 체계도 구체화하게 됩니다.

일본과 여러 국가에서 남양화교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자금조달과 무기 공급을 준비하게 되구요. 흥중회 지부도 설립합니다. 남양 지역은 말레이시아, 태국, 베트남,필리핀과 같은 동남아 지역으로 상공업을 하던 중국화교들이 많이 있던 지역입니다. 중국 본토와 분리된 곳이라 쑨원이 망명 생활을 하면서 봉기 기획을 할때 유익을 준 지역이고, 화교들의 자금력의 혜택도 있던 지역이죠.

1900년 위화단 사건 이후 청조의 사정이 어수선할때 쑨원은 다시 혜주에서 봉기를 일으킵니다. 7일간의 전투 결과 파죽지세로 승전하고 기세가 오르지만, 늘어난 민병포함한 병력을 유지할 식량 조달 난국과 무기의 공급실패로 결과적으로 실패로 돌아갑니다.

1905년에는 흥중회와 황싱의 화흥회 등을 규합하여 중국동맹회를 결성하게 됩니다. 쑨원은 군사력으로 밀어붙여 청조를 몰아내는 전략을 지지했으나 무기 조달이나 고정된 지역적, 물질적 기반에서 군대를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해외에서 지휘를 해서 조달하는 방법을 썼구요. 그당시 쑨원 이외의 혁명파들과 규합 제의를 해서 세력을 통일하고자 한 시도도 여러번 하게 됩니다. 영화에 나오는 동지애로 뭉친 쑨원과 황싱도 서로 독립되어 활동하던 혁명운동파였으나 1905년 중국동맹회 설립 이후 끈끈한 동지가 되어 신해혁명 이후 설립된 중화민국의 지도부에서도 활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청조에서 조치를 내려 여러 외국에서 쑨원을 강제추방하는 바람에 일본이나 런던 등지보다 동남아에 지부를 설치해서 활동하죠.

일본팽창주의자들의 지원도 얻어내고 필리핀 독립 운동 지지 댓가로 무기 공급도 받고, 신해혁명 이후에는 갈라진 남방정부와 북방정부의 해결을 위해 소련과 연합하기도 하고 중국공산당과 국공합작도 하는데요. 이에 대한 일관된 방법은 외세들의 세력이나 혁명파 외부의 세력과 규합해서 군사력을 얻고 행동에 임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후에 비판점이 되기도 했으나 일단은 열강이든 군벌이든 상관없이 반청활동에 도움이 되면 임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해혁명이 발발한 1911년에는 쑨원은 해외에 있었습니다. 신해혁명 자체가 쑨원 독창이기보다는 청일전쟁 이후에 있던 열강의 이권침탈에 의한 철도국유화 사건과, 쓰촨성 사람들의 불만 등이 폭발하여 민심이 청조를 떠난 시절에, 군사력도 약화된 틈을 타서 우창에서 중국동맹회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우창 혁명에 동조하는 성들이 협력하여 독립을 선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지구요. 난징에 임시정부를 세웁니다. 청조는 이 세력이 밀려서 위안스카이라는 군벌에게 진압을 요청하지만, 쑨원을 필두로 한 혁명지도부는 위안스카이와 협력하고, 오히려 청조를 무너트리는 결정적인 반전을 일으켜내죠.

중화민국의 탄생은 1911년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시작되는데요. 민생, 민권, 민족주의를 중요하게 여긴 쑨원의 사상에 대해 공산주의자였던 모택동이 호평한 이래, 오히려 대만의 국부가 된 쑨원의 사상을 중국대륙에서도 환영하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은 특기할만한 사실입니다.

1912년 중화민국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쑨원이 1대 임시대총통이 되구요. 약속했던대로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하게 됩니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권력욕이 있던 자라, 임시약법을 무시하고 국민당 요원들을 암살하는 등의 조치로 국민당을 와해시키고 황제 참칭을 하게 되구요. 이에 대해 쑨원과 황싱의 위안스카이 신뢰에 대한 의문도 비판점이 되지만 여튼 위안스카이가 가진 군사력에 의해 국민당 지도부는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여러 토벌 시도가 있었고 위안스카이도 여러 결정을 취소하는 등의 오락가락한 상태가 되다가 그가 죽고나서 쑨원은 귀국하여 광주 지방에 남방정권을 세우는데요. 위안스카이가 근거로 하던 북양정권은 돤치루이가 장악해서 북방정권으로 불립니다.

쑨원은 북벌을 시도하게 되죠.

이시기에 “쑨원학설”, “건국대강” 등의 저술을 발표합니다. 대원수가 되어 중국국민당의 개조 운동도 벌이구요. 비판자들은 쑨원이 제시한 방략 중에 사회개혁의 순서를 분석해서 비판하기도 하네요. 군사정부의 역할이나 민권이양 등의 핵심 내용에 대해 공화정부를 제시하고도 독재처럼 되는 것에 대한 비판점입니다. 이 시대는 현재와 달리 민권이나 민생이 안정이 안된 시대라, 강력한 군사정부가 나라의 혼돈을 수습하고, 점차적으로 민권에게 이양하는 과정을 서술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 정설이네요.

일단 위안스카이 사후 5.4 운동까지가 신해혁명의 끝으로 봅니다.

위안스카이 실각후 있는 일들은요.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소련이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중국내 중국공산당을 지도하는 일련의 흐름에서 일본의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국공합작을 하는 것이 유명한 사건입니다. 소련과의 합작에 의해 국민당 개조 작업에 들어가 공산당 당원도 국민당에 입당하구요. 소련 정부의 정책적 지도와 같은 지원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북방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북벌을 단행하구요. 1925년 간암으로 쑨원이 죽네요. 장개석이 지휘를 이어가서 북벌에 성공한 후, 진정한 중화민국이 세워집니다. 그러나 다들 아시듯이 공산당과의 내전이 발발해서 국민당은 대만으로 피신하고 대만에서는 쑨원을 국부로 모시는 전통이 세워집니다.

영화에서는 쑨원과 황싱의 혁명 완수의 활동 과정 중심으로 소개하구요. 배우자들과의 정서적인 유대도 그려냅니다. 이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좋은 영화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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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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