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돌은 누구인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남아있는가

쇼와 시대의 아이돌, 쇼와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간 존재들인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던 재기발랄한 시대를 거쳐 지금도 우리의 곁에 함께 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동경의 대상들이다. 쇼와 시대에 10대이던 아이돌들은 이제 황혼기를 맞이하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그들의 아들과 딸이 된 연령대의 팬들도, 쇼와돌과 동시대를 추억한다. 그시대의 정감을 더불어  느끼지는 못했을지라도 왠지 모를 동경과 향수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쇼와돌들은 자신들이 가야할 길은 예능이었고 지금도 가야한다는 철저한 프로 의식으로 살아온 인물들이다. 쇼와돌들은 이로써 시대와 만난다. 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곁에 살아있는 동시대의 우상이며 매우 상징적인 위치를 점하는 천상 예능인일 것이다.

1945년 이후 일본이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전을 한 시대에 피폐함도 경험한 일본 경제는 차츰 사회적으로 회복되어 바야흐로 호황기를 맞이하게 된다. 폭격과 궁핍의 시대를 거쳐 경제가 발전하게 된 그 정점에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이돌들은 그 시대의 우상이자 아이콘이었다. 전후 세대라는 말이 일본에서도 있게 된 신세대의 시대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아이돌들의 데뷔와 함께 흘렀고, 이 시대가 쇼와 시대의 정통파 아이돌의 역사가 시작되는 기점이었다.

쇼와 시대의 아이돌들은 크고 작은 역사를 만들었고 그들이 남긴 흔적은 하나둘 누적되어 21세기인 현재에도 시대와 다시 만나고 있다. 이제는 너무나도 익숙해진 이름 아이돌. 우리들은 쇼와시대의 끝자락을 수놓은 아이돌의 팬이라는 정체성 이전에 그들이 누구이고 우리에게 어떤 존재로 남을지를 우선적으로 인식하는 인식자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쇼와돌들의 정체성을 아는 것은 결국 팬들이기도 한 우리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있어 선결되어야 할 사안이기 때문이다.

아이돌의 기원

일본 전통의 가극 가부키는 배우의 기예를 본위로 하는 공연이다. 진한 메이크업에 등장인물의 도드라진 연기는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주된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고 스타가 되기도 하고 관객들의 호의 대상이 된다. 매우 선명한 분장은 볼거리를 선사한다. 호의를 받은 배우는 많이 받으면 받을수록 스타의 영예를 안는다. 인터넷 시대처럼 유튜브에 올리면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시대는 아니었으나 그런만큼 스타가 된다는 것 자체가 영예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귀중한 예능의 한 조건이 되는 시대였다.

아이돌 문화가 본격 시작되기 전, 메이크업과 복색, 유일무이한 공연이라는 가부키의 형식은 현대 아이돌 산업에서 아이돌의 외모가 중요하게 여겨지고 호평을 받아 대중 앞에 서서 공연하는 현재의 아이돌 체제와 유사한 것 같다. 지금처럼 조직적인 지무쇼 체제는 없었어도 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스타는 존재했다. 이 시대에는 예능인의 외모보다는 정감이나 능력에 주안점이 있었던 시대였다. 뛰어난 공연력을 지닌 연기자는 주목받았다.

쇼와 시대는 아주 후대였던 1980년대의 아이돌을 수식하는 표어인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에서 하나의 세공된 보석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음”과 같은 말이 있듯이 실력 본위보다는 팬들이 즐길 수 있는 화두와 내러티브의 시대였다.

스타와 스타를 지탱하는 스타 시스템은 내러티브로 특징되는 특성을 지닌 현상이다. 서사는 아이돌 산업의 근원이었다. 스타가 공연하는 활동상은 전설로 남아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와 이미 끝난 이야기의 근간을 이룬다. 스타 시스템이라고 불리는 이 팬덤의 체제는 현대적으로는 굿즈의 판매와 소비라는 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그저 사고 파는 것이 아닌 예능의 공연과 관람이라는 것의 배후에는 이야깃거리라는 놀이의 향유가 자리하고 있고 이로부터 아이돌이라는 체제가 성립하게 된 것이다.

가부키나 부기우기 공연과 같은 공연 산업에서도 이야깃거리는 중요한 향유 내용이 된다. 이야깃거리의 주제는 공연의 내용이기도 했지만, 그 공연을 이끌어간 예능인 그자체에게도 초점이 모아진다. 체계적인 아이돌 산업이 아직 성립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아이돌이라는 스타 시스템의 기원이 있었던 것이다.

현대적 의미로서의 아이돌 체제의 성립 과정

1850년대가 되면 일본에 서양의 배들이 자주 찾아오는 시대가 되었다. 1850년대 미국의 페리항모가 일본에 통상압력을 행사한다. 이에 통상조약을 맺게 된 일본에서 최초의 서양음악이라고 불리우는 연주가 페리항모의 군악대 상륙 시점에 연주된다. 그 이전에도 서양배들의 당도는 있었지만, 서양음악의 전래에서 페리항모의 당도는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그이후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서양음악은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일본인들에게 향유된다. 특히 미국에서 유래한 고유 장르였던 재즈의 영향력이 강했는데, 재즈 연주팀의 일원들은 전문 가수로서의 직업적인 특징을 가진 뮤지션들이었다.

지금도 재즈는 재즈킷사(다방)으로 존재해왔으며 무라카미 하루키와 같은 전문작가들에 의해 저술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재즈는 일본인들에게 친숙하고 사랑받는 장르로, 여러 재즈 밴드를 이룬다는 측면에서 현대 서양음악에 기반한 예능 활동의 하나로 분류될 수 있다.

이 시대의 특징은 생연주와 같이 한 공간에서 한 시점의 시간으로 공연되는 유일무이한 특성이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듣고 싶을때 마음껏 재생하는 연주가 아니라, 특정 시공간에 한정된 음악이라 그 가치가 컸다. 이러한 특성은 제한적이기도 했는데 다시 재현한다는 것이 지닌 수고로움이나 시공간적 특성이 지닌 이미 지나가면 없어저버리는 속성 때문이었다.

이런 유일무이한 시공간의 제한은 이내 종언을 맞는다. 다이쇼 말기부터 쇼와시대의 시작이 되는 무렵 라디오가 개통이 되어 인기를 누리게 되어서 였고, 시대를 선도한 축음기의 발명에 의해 레코드의 판매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라디오와 축음기의 발명은 기술의 혁신이었는데, 이는 이전 시대에 생연주처럼 시간적으로 유일무이하게만 들어야 했던 공연 재생의 제한이 풀리는 계기였다. 반드시 연주 장소에 가야 한다는 공간적 제약을 풀은 획기적인 사건이었을뿐아니라, 이에 더해 레코드 취입을 위해 레코드 회사와 작곡가, 작사가, 가수의 전속계약 시스템이 시작된 것이라 의미가 있다. 이는 전속계약이라는 시스템이 이후의 게노오지무쇼 시스템 (소속사 시스템)의 시작점이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스타 선발과 전속계약의 시작점이었다.

최초의 라디오 방송은 베토벤 교향곡 5번을 틀어주는 방송이었다. 최초 방송후 1년후에는 10만인의 청취자가 있었다. 레코드판의 규격도 날로 발전하게 되었고 축음기도 휴대가 가능한 제품이 있게 되었다.

이 시대의 감상자들은 약간의 애수에 찬 듯한 레코드판 연주와 약간의 쇳소리가 끼어든 듯한 애상적인 음악을 들으며 마음속 깊이 사무치는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이때의 혁명은 물론  시공간의 제약이 사라졌다는 것이지만, 공연 모습은 상상속에 존재했고,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대의 제약조건은 이후에 출현한 텔레비전 산업의 소개와 함께 다시 한번 깨어지게 된다.

가요산업의 비즈니스화

레코드 회사가 주도한 가요산업은 현대판 아이돌 산업의 경제적 효과의 전신이다. 재능이 있는 작사가와 작곡가가 팀업해서 노래를 만들고 실력 있는 가수가 불러 취입한다. 이들은 레코드 회사와 계약을 맺고 레코드판을 내는 임무를 부여받아 활동했다. 이들이 성공하면 그런만큼 산업적 이득을 안겨다주었으며 이는 예능 산업이라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한 사례가 된다는 것과 같았다.

이때 데뷔해서 이름을 날린 작사가와 작곡가, 가수는 여럿이다. 사이조 야소, 나카야마 신뻬이, 핫토리 료이치, 아와야 노리코, 카사기 시즈코와 같은 인물이 그들이다. 특히 1940년대 매우 뛰어난 코믹한 무대매너로 인기를 끈 카사기 시즈코는 도쿄부기라고 한 그당시로는 매우 활기차고 코믹한 댄스동작으로 인기를 얻는다. 작곡가 핫토리 료이치와 팀업되어 여러 노래를 발표하는데, 1980년대 사망하기까지 영화에도 출연하고 홍백가합전에서도 홍조의 토리를 맏아 부르기도 했다. 이 카사기 시즈코는 일본 패전 후 활동한 가수 중에서 독특한 컨셉과 공연으로 주목받은 사례이고, 이 시대에 아직 자리가 잡힌 것은 아니지만 일본 음악산업에 있어 초창기의 아이돌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라디오와 레코드 이외에도 가요산업을 이끌어온 것은 영화산업이다. 1945년부터 1950년대 사이의 기간에 명감독 구로사와 아키라가 국제 영화제에서 입상한 이래, 부흥기가 찾아온다. 관객들은 영화를 즐겨 보았다. 이 시기의 영화 산업의 특징은 영화에 출연한 연기자가 영화의 주제가를 맡아 불렀다는 것이고, 이는 영화 산업이 음악 산업과 함께 예능을 이끌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아직 현대적 아이돌에 대한 정의가 없었던 그 시대에도 연기와 노래를 겸업하는 아이돌 스타의 원형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970년대 이후로 오디션 프로가 인기를 끌때, 어린이들도 데뷔의 붐을 이루는데, 그 한참 전의 시대였던 1940년대 이후의 영화 부흥기에서도 같은 특징의 스타가 등장하게 된다. 9살에 데뷔해서 그후로 40년을 거물급 가수로 시대를 풍미한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그 주인공이다. 이분은 한국으로 치자면 패티킴이나 이미자와 같은 스케일의 가수였다.

그러나 이때는 현대적인 지무쇼 시스템이 자리잡히지 않았던 시대였고 음악 산업의 법규가 미비한 점이 있었던 것 같다. 히바리가 그당시 인기였던 시즈코의 노래를 너무 자주 부르자, 이를 시즈코측이 제지를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는 노래라는 저작물의 저작권이 사업에 중요함을 그당시에도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현대처럼 막대한 이윤을 주는 기업형 지무쇼가 거의 없다시피 한 체제라, 지금과 같은 대규모 비즈니스 법규가 미미했었지만, 인식은 있었음을 의미한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부흥하는 아이돌 문화

그렇게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가 되면 경제의 호황기를 맞아 칼라 텔레비전의 보급이 늘어난다. 이는 과거의 기술 혁신보다 더 획기적이었는데, 듣는 공연에서 보는 공연이 되었다는 것과, 이로부터 매력적인 용모를 선발해서 회사 차원에서 집중 관리를 하고 의상 선택과 메이크업 등이 스타덤의 중요한 요소가 되어 미소년, 미소녀들의 춤과 안무와 함께 성장해간다는 것에 있다. 이에 더해 방송국이 기획하는 무대 장치의 혁신도 이루어져서 중요한 변동 사항을 몰고 온다. 지무쇼 체제가 자리잡힌 시대이기도 하고 아이돌 원석의 발굴과 함께 본격적인 아이돌 시대가 열리는 계기를 맞이하는 시대였다.

한마디로 말해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이행하게 된 결정적 계기가 텔레비전의 보급이었고, 가수의 외모와 복장 등의 요소가 더욱 더 중요하게 대두하여 특별히 이러한 주제를 관심있어 하는 젊은층의 참여가 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공

이러했던 1970년대 첫방송되어 수많은 아이돌들의 산실이 된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탄죠(스타탄생)은 칼라 텔레비전 시대에 어린이들의 예능 감상이 쉽게 된 현상을 대표했고, 어린이들이 직접 가수 데뷔도 할 수 있게 해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 구성은 한국에서도 방송된 위대한 탄생과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전국에서 응모를 받아 출전자를 선발해서 방송에 내보내고 공연후 심사위원들의 평가를 거쳐 최종 선발된 우승자를 결정하는데 있었다. 이는 가수등용문이라는 것도 의미하고 예능 산업이 아이돌이라는 어린 세대들의 우상을 만드는 시대가 열렸다는 것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쇼와시대 아이돌 즉 쇼와돌은 1970년대 이후에 출현한 사람들이다. 스타탄죠는 이러한 산실의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 의미가 깊다.

스타탄죠 출신으로 활발한 활동을 한 역사에 남은 인물로는 모리 마사코(최초 그랜드 챔피언). 사쿠라다 준코(타회차 결선의 그랜드 챔피언), 야마구치 모모에(준코 다음 순위로 준우승), 나카모리 아키나(38회 그랜드챔피온), 교이즈미 쿄코 등이다. 이들은 모두 현재 일본 가요계의 전설로 통하는 스타로 남아있으며 쇼와돌을 좋아한다고 할대 대다수의 팬들이 감상을 거쳐가는 스케일이 큰 가수들이다.

1970년대 이후

일본의 가요 산업의 특징은 약간의 자유분방한 성 문화의 영향인지, 가수들에게 성별의 특징을 살린 사진화보를 흔하게 찍는다는데 있다. 여성의 경우 여성의 건강미라는 말로 지칭되는데, 이는 텔레비전 시대에 보는 재미를 위한 용도로 시작되어 출판물에도 이르게 했다. 이 시대가 되면 음반판매량뿐 아니라 포스터 판매량도 인기의 척도가 되곤 했다. 이를 아예 공연이나 복장의 특색으로 삼기도 했는데 핑크 레디와 같은 걸그룹이 그러한 예시가 된다.

1980년대는 가히 아이돌의 황금시대로 불린다. 스타탄죠와 비견되는 오디션 프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완전한 오디션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오냥코 클럽이나 모모코 같은 아이돌 발굴 프로가 인기를 끈다. 이 프로들은 어린 나이에 데뷔하는 아이돌 문화의 상징이자 등용문이었다. 오냥코 클럽에 출연했던 구도 시즈카나 모모코에 출연한 사카이 노리코와 같은 아이돌은 쇼와 시대 끝자락을 풍비한 가수 겸 배우로 성장한다.

이시대는 앞서 누적된 경험이 발휘되기 시작한 시기다. 지무쇼는 노하우를 축적하고 자본을 모으면서 방송국에 비견되는 비즈니스 파워를 지니게 된다. 지금의 쟈니스 같은 지무쇼가 있을 수 있는 동력이 1970년대, 1980년대에 축적된 결과라고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즉, 아이돌이라는 스타 시스템은 일본에 서양음악이 전래되어 공식적이 되고, 게노오지무쇼의 설립과 함께 산업적, 기술적 발전을 거듭해서 아이돌 전성시대의 예비가 된 시대를 거쳐 쇼와 시대 말기까지 격동의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1980년대 이후가 되어 1990년대가 되면 아이돌의 빙하기가 온다고 하기도 한다. 아이돌과 같은 특징을 가진 가수가 데뷔를 안한 것은 아니지만, 1970년대, 1980년대보다는 정통파 아이돌이 아닌 한풀꺾인 아이돌 러쉬 종료의 시기다. 이런 업계 사정과 더불어 우연하게도 히로이토 천황이 사망하여 연호가 바뀌는 것이 1989년이라, 그전에 데뷔한 아이돌을 가리켜 쇼와돌이라고 한다. 천황의 연호였던 쇼와에 아이돌을 뜻하는 돌을 붙인 말로, 이시대의 격변과 향수의 감성은 지금도 공감을 얻어 수많은 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이 앱은 쇼와 시대 아이돌의 예능사적 의미와 이시대에 활동한 아이돌 소개를 위해 만들어졌다. 부족한 글이지만, 재밌게 읽어주시면 저로서는 대단한 영광이며 보람이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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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청색공책
청색공책은 프리랜서 프로그래머이자 정보 제공자입니다. 어린 시절의 몸 고생 마음 고생을 이겨내고 활로를 찾습니다. 평소에는 주로 탐구 생활을 하고 있으며 글쓰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관심분야가 특징이구요. 도서관 사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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