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의 주저를 깊이 있게 읽어보려고 판본을 재차 구해두었다. 해설을 다양하게 읽어보면서 기존의 기반을 확인하고 내 생각을 명료하게 체계화하기 위함이다. 전번에는 버클리 관련 과제물 할 때 유심론의 귀결을 비판하는 의미에서 일반화의 지지 가능성을 보존하는 관점에서 해두었다면 지금은 그가 말하는 핵심 명제인 “물질적 실체는 지각되는 한 마음에 존재한다”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있게 사유해보려는 의도에서 하려고 한다.
버클리의 핵심 주장은 모든 사물은 마음 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다. 암스트롱이 조금 과격하지만 잘 전제해둔 것처럼 “물질적 실체는 지각하는 한 마음에 존재한다” (Physical objects cannot exist unperceived) 처럼 외부 사물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미묘한 인식자 내부의 정신적 상태를 중요시하는 것 같다.
버클리는 감각 경험을 설명할 때 독특한 입장과 용법을 고수하는데, 물질이라는 말 대신 물질적 실체라는 말을 즐겨 쓴다. 버클리가 표적으로 하는 것은 감각한 것의 지위 문제다. 그가 표적으로 하는 감각함은 일종의 인식적 실패를 의미하는 것 같다. 실용적인 예를 들자면, 사르트르가 버클리의 언명을 도입해서 말할 때의 의도처럼, 심각한 존재의 안위 훼손에 대한 인식적 실패랄지, 존재의 비환원적인 것을 이론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의 이론이 유심론이라고 할 때
(1) 모든 실체는 지각되는 한 마음에 존재한다
(2) 인식 밖의 존재는 인식 독립적이다
이 두가지 전제 하에 가능한 것이다. 즉 인성비평은 지각되는 한 마음에 존재하며, 인식 밖의 존재는 인식 독립적이다라고 해석이 가능해진다.
버클리는 주관적 관념론자로도 분류된다. 그의 논증에서 쓰이는 기존의 개념어들이 일반적인 용법대로 쓰이기보다 미묘한 표상주의 비판에 의해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예컨데 물질이라고 안하고 물질적 실체라는 의미를 주거나, 속성이라고 안하고 감각적 속성이라고 할 때처럼 모든 것의 지각작용을 은어적으로 쓰려고 하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이에 더해 그의 이해체계에서 물질적 사물(material object)가 이해되는 방식도 표상주의적으로 읽으면 외부 사물로 객관화되서 일관되게 이해되지만, 그가 표상주의에 반대하면서 비판한 전제 하에서는 기존의 객관적 의미 토대보다는 은어적으로 쓰는 것을 의도하는 듯하다. 즉 사물로 번역하지 않고, 즉 물질로 보지 않고, 목적성(object)로 보는 것이다. 이 경우 material이라는 의미도 은어적인데 주어진 그대로 생각하는 것, 기존 체계를 그대로 따르는 무지함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의 저작 전체에서 드러나는 제안들은 개념어 자체에 대한 다른 사유의 시도가 드러나 있고 그래서 주관적 관념론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버클리가 표상주의적이지만, 명시적으로는 표상주의에 반대한 것은 로크에 대한 비판에서 잘 나타나는데 물리적 사물에 대한 1차, 2차 성질의 귀속이 단지 마음 속에 표상되는 한에서 가능하다고 하면서 감각적 속성에 불과함을 주장한다. 로크는 표상적 실재론자인데 외부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감각에 대해 논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버클리는 사물에 내재한 속성도 실재로는 마음에서 일으켜진 감각에 불과하다고 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함의는 과학과 회의주의의 문맥에서 볼 때 실체와 표상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암스트롱은 이를 잘 짚어내고 비판을 한다. 버클리의 핵심 명제에서 unperceived라는 말의 근본 요지는 외부 사물의 실체가 비존재한다는게 아니라 인성비평적인 상황에서 보면 인성비평의 토대는 인식의 실패이고 그것의 기반은 지각함이므로 대상과 구분된다고 일관되게 이해될 수 있으나, 암스트롱에 의하면 지각을 문제시하는 것은 너무 근본적이라 넓은 의미의 이해를 구하기도 어렵고 일반화하기에도 부담이 있게 된다고 한다. 지각하든 말든 외부 실체는 존재하고 있다고 인정한다면, 이 인식 독립적인 존재는 있다고 인정해야 되고, 마음의 인식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마음에 지각된 것만 존재한다고 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버클리의 윤리적인 의미로 보면 마음 밖 실재를 명시적으로 인정하기가 어렵다. 예컨데 인성비평도 실재한다고 인정해야 되므로 마음에 지각된 것만 존재한다고 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유심론의 인식 주체 보존의 의의를 살리려면 그에 대한 사유의 결과나 개념화의 결과를 문제시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학문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얻으면서도 존재의 안위를 보존할 수 있는 상식적인 방법이다. 그래서 사르트르 같은 자유의 철학자도 그의 주저 존재와 무에서 버클리의 언명 esse is percipi나 esse is percipere를 논의하면서도 버클리에게 전면적으로 찬성하고 있지 않다. 암스트롱도 그의 의도를 적절하게 주장하려면 지각을 문제삼기보다 사유의 결과(thought of) 또는 개념화의 결과(conceived)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된다고 하고 있다.
실재로 버클리는 초기저작에서 그당시 발하던 뉴튼의 시각이론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고 후기저작에서 미적분에 대해서도 비판받는다. 이에 대해 현대적인 관점에서는 주관적 관념론자로 버클리를 분류하는 근거가 되는데 반면교서로 참고할 수는 있어도 불합리한 점이 있다는 해석이 주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