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질 C. 올드리치 저자(글) · 오병남 번역
서광사 · 2004년 12월 30일
예술철학은 그 이름에서 목적 대상이 비교적 그럴듯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예술’을 다루는 ‘철학’. 그러나 그 이름의 외연만큼 다루는 주제의 폭과 관심사가 그 나이와 분파만큼 다양해서 예술철학이라는 한가지 외연만으로는 모두 드러내지 못하는게 일반이다. 예술의 역사와 사조, 개념의 분석과 같은 것 자체가 방대하다. 그리고 분석된 개념들이 실재에 적용되는 양태와 실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등등이 예술철학의 외연이 갖는 복잡함과 방대함을 심화시켰다는 것은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술철학의 입문서들은 그 실로 방대한 분야들과 개념들을 몇가지만 추려내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서른가지의 개념과 분야만을 추려내서 설명하는 ‘미학의 문제와 방법(미학대계간행회, 2007)’ 같은 책들은 입문서임에도 천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출간이 되어 있다. 올드리치가 저술하고 오병남님이 번역한 ‘예술철학(1963)’은 필수적인 개념들을 몇가지 추려내서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되 예술철학이라는 외연 아래 무엇이 논의되고 또 논의되어야 하는지를 입문자들에게 이해되기 쉽게 설명해내고 있어서 미학의 문제와 방법을 읽고나서 반드시 읽어봐야 되는 책으로 생각되었다. 읽어본 결과 상당히 만족스럽다. 번역도 매끄럽게 잘 되어있고 다루는 주제들도 긴밀하고 유기체적으로 잘 설명되어 있다. 다루는 주제들은 분석미학적 전통에 가까운 것들인데. 크게 네 개의 장으로 나눠 배치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제1장에서 미적 경험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제2장에서 예술작품에 수반되는 개념과 예술작품이라는 것의 속성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으며 제4장에서는 예술에 대한 언급의 논리라는 장을 따로 마련해서 바람직한 예술철학의 설명 방식에 대해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유기체적으로 관련 개념들을 논의해가고 있는 점, 논문집처럼 제한된 주제에 대해서 다루듯이 논리적 일변도이거나 이론적으로만 따져보지 않고 제3장에서 여러 형태의 예술들에 대해서도 논의한다는 점에서 균형잡힌 입문서로 흠결이 없는 것 같다. ‘예술’을 다루는 ‘철학’의 한가지 방식을 제시해뒀다. 이 서평에서는 예술을 다루는 철학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지를 각 장에서 논의된 내용에서 주목해볼만한 것들을 정리해보면서 이책의 내용을 조망해본다.
제1장 미적 경험
예술작품을 수식하는 말로 가장 널리 쓰이는 말은 무엇보다도 ‘아름답다’라는 수식어일 것이다. 예술철학에서는 이 ‘아름답다’라고 하는 술어의 목적어가 예술작품이 되었을 때 그 복잡다기한 경험을 다룬다. 가령 뉴먼의 1970년작 ‘누가 빨강, 노랑, 파랑을 두려워하랴’라는 작품을 보고 똘이는 ‘저게 무슨 예술작품이야’라고 할 수도 있고 만득이는 ‘참 아름다운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두가지 진술에서 똘이는 불쾌(싫어함)의 감정을 드러냈고 만득이는 쾌(좋아함)의 감정을 드러냈다. 불쾌나 쾌는 예술작품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경험하는 특수한 경험이다. 이런 특수한 경험을 예술철학에서는 미적 경험이라고 하는데 미적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으로서 예술작품을 특별히 미적 대상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수식할 때 쓰는 ‘아름답다’라는 술어도 사실은 미적 대상의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에 의해서 촉발된 것이다. 이런 아름다움이라는 속성을 논의해온 분야가 바로 예술철학이다. 뉴먼의 작품이 미적 경험을 촉발한다면 미적 경험을 촉발하는 원리는 무엇인가, 예술작품이 미적인 것이라면 미적 경험을 촉발하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논의해왔다.
미적 경험에 대한 논의를 소개하기 전에 먼저 연구의 초점이 전통적으로 어떻게 되어왔는지를 살펴보는게 필요하다. 연구의 초점은 미적인 것과 미적 경험의 개념 구분에 모아져왔다. 구체적으로 요약하자면 ‘미적 경험을 촉발하는 요인’은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예술작품(가령 뉴먼의 그림)에 있는가, 혹은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의 마음 속’에 있는가의 여부를 밝혀내려고 했다. 이른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라는 두 가지 전통미학의 사조를 말하는데. 개념적 구분을 위해서 구분되어 옹호되온 경향이 있던 것이 사실이다. 대부분의 철학적 개념 구분이 마찬가지겠지만 사실상 종합을 목표로 해야 됨은 당연하다. 고전적 구분처럼 미적 경험의 요인이 예술작품 속에 있다고 하면 감관적 인상을 아우를 수 없게 되고, 감상자의 마음 속에 있다고 하면 미적 원리로서의 객관성이 쉽게 보장될 수 없는 이유에서 종합의 시도는 의미가 있다. 어떤 식으로 종합이 될 수 있을까?
객관주의와 주관주의는 모두 예술 작품을 경험하는 것의 원리성이다. 예술 작품을 경험한다는 것은 미학적으로 어떤 원리를 수반하는가? 감상자나 예술가가 예술을 경험하는 지각 방식은 일반적인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과는 다른 국면이 있음을 우리는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뉴먼의 그림을 보면서 우리는 우선 직사각형의 캔버스를 인지하고 색상이 몇가지나 쓰였으며 색상의 배치는 어떤 순서로 되어있는지를 알게 된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물을 지각하는 방식과 일단은 공통되는 부분이다. 이것을 비미적인 ‘객관적 국면’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해보자. 우리는 비미적인 객관적 국면을 인지하려고 예술을 감상하지 않는다. 뭔가 느끼고 의미가 주어지는 미적 경험을 하려고 감상한다. 가령 뉴먼의 그림에 채색되어있는 색상에 의미를 주고 이해하려 한다. 그러한 의미의 감각적 연쇄로 미적인 인상을 즐기는 것. 이것을 미적인 ‘주관적 국면’을 ‘감지하는 것’이라고 해보면. 객관적 국면의 관찰이라는 것은 예술작품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대상인 한 예술의 경험이 전개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작용이다. 그리고 주관적 국면의 감지 또한 미적으로 의미있는 감상이 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철학적 논의로서 예술철학은 이러한 과정을 원리적으로 어떻게 정의해야 되는지를 논의해왔다. 앞서 언급한 객관주의는 객관적 국면의 성격, 물리적 측면에 구심점을 두면서 논의해왔고 주관주의는 주관적 국면의 감지, 정신적 측면에 구심점을 두면서 논의해온 입장으로 되어왔다.
이런 논의는 예술의 맥락에서 일반적인 사물 자체가 충족시켜놓고 있어야만 되는 조건들을 진술하는 문제와는 구별되고 있다. 미적 경험의 맥락에서는 물리적 측면에 구심점을 둔다고 해도 결국 정신적 측면의 촉발 요인이 무엇인지를 논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물리적인 것을 인식한다는 점을 함축하는 ‘지각’이라는 용어와 주관적인 것을 경험한다는 ‘미적’이라는 용어를 합해서 ‘미적 지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미적 경험에 대해서 논의하려면 이 미적 지각이라는 개념의 위치를 설정하는 일로부터 논의를 출발해야 하고, 그렇게 하면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양분된 입장을 종합하는 가능성이 찾아지게 된다.
올드리치는 미적 지각의 구조와 작용 순서를 나타낸 전통 이론을 소개하기 위해서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라는 도표를 소개한다.
도표에서 드러나듯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은 이원론답게 심적 영역과 물리적 영역을 분리해놓고 있다. 두 가지 국면을 종합하려면 앞으로 언급되어갈 논의에서처럼 영역 구분보다는 미적 지각의 상호작용에 더 구심점을 두어야 한다. 앞으로 살펴볼 새로운 도표는 미적 지각의 상호작용에 더 구심점을 두어도 물리적 대상성도 보존됨을 알 수 있을 것인데. 올드리치는 새로운 도표를 제시하기에 앞서 데카르트의 도표적 구분에 대해서 이렇게 비판한다.
“이와 같은 이원론에 반대하는 유명한 반론들이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도되어 오고 있지만 이들 반론들 역시 미적 지각이 주관적인 것이냐 아니면 객관적인 것이냐 하는 질문이 있게 될 때면, 이러한 이원론의 모델 때문에 그들은 늘 난처한 입장이 되어 곤란을 겪어오고는 했다. 왜냐하면 이원론의 모델에 의하면 사물을 정말로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데에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을 뿐이라고 되기 때문이다. 즉 관찰(observation)이라는 자격의 지각만이 객관적인 것으로 허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사물을 가장 정확히 바라보는 것이 초점이 될 경우, 이러한 관찰은 감정뿐 아니라 결국에 가서는 감각이나 감관적 인상마저 추방시켜 놓는 통제하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개념의 작용이나 사고의 편에 서서 지각으로부터 모든 것이 여과되어 버리고 만다. … 그러나 확신컨데 인상이나 감정은 어떠한 식으로든 미적 경험에 통합되어 있어야 할 필수 불가결한 것인들 만큼, 이러한 관찰이 미적 경험이라고 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요소들이 여과되고 나면 미적 경험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되고 말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학의 경향은 불가피하게 미적 경험의 주관성을 인정하며, 엄밀한 의미에서 미적 경험 그 자체는 단순히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거나, 또는 실제로 “저 밖에 있는” 물리적 대상에 불과한 것에 관해 일종의 이중적인 언급을 하고 있는 것으로서, 전혀 그 자신의 대상을 지니지 않는 것이라는 견해를 수용하는 입장이 되어왔다. 또 어떤 이는 사람을 당혹케 하는 이러한 식의 열기를 과학적인 경험 곧 관찰로까지 확대시켜, 그러한 관찰도 결국은 마음의 주관적인 내용에 관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p.27-p.28)
이런 견해로 올드리치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실재적 논의의 열기 속에서 현실적 문제를 만든다는 것이다. 무슨 문제일까?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구분이 미적 지각이라는 감상자의 감관적 경험을 파고들기보다는 ‘물리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영역 구분에 구심점을 둬버리고 나서 논의하다보니까 미적 경험보다는 뭐가 더 ‘객관적’이고 올바르냐는 식의 결론으로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즉 미학적 견지에서 미적 경험에서 요청되는 원리를 과학적인 관찰에까지 적용한다거나, 과학적인 관찰의 원리를 미학적 원리로 바꿔치기한다거나 그런 것이다. 다양한 미적 경험은 주어진 미적 대상에 주관을 얼마나 가하는지 그 정도의 차이에 따라 그 특성이 달라진다. 미적 경험은 주관적인 미의 경험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지만 산타야나와 딕키가 주장한 것처럼 음악을 듣고 악곡을 분석하려는 사람이 주관을 덜 적용하면서 분석적이면서 객관적인 미의 경험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며 시험 공부를 하면서 지식을 축적하려고 미의 경험을 시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객관적 미의 경험을 하면서 즐거움의 감정을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행동을 촉진하는 주관적 경향으로부터 떨어져 있을 수 있으며 정관적 지각을 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대상의 본질적 특질로서 나타날 수 있다. 감상을 통해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분석을 통해서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것 모두 예술 활동의 일부라면 비미적인 객관적 경험도 중요하고 미적인 주관적 경험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의 토대를 찾는 것이 현대 미학자들에게서 관심을 모아왔으며 올드리치는 이책에서 이런 설명적 토대를 찾으려 한다. 이들을 어느 하나만 올바르다고 하지 않으면서도 미적 경험의 국면들로 종합할 수 있는 원리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
올드리치는 우리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입체 도형을 예시해놓고 있다.
입체 도형은 무엇을 형상화해둔 것일까? 객관적으로 보면 물리적인 특성을 그려놓은 것이다. 가령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입체 도형’일 뿐이라고 보는 것. 주관을 개입시켜보면 좀 더 다양한 국면으로 볼 수도 있다. 올드리치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느껴봄직한 것을 부언해두었는데. ‘위에서 내려다본 전등갓’이라고 볼 수도 있겠고 ‘밑에서 올려다본 전등갓’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터널의 한쪽 끝에서 저 편 끝을 들여다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꼭대기 부분이 절단된 피라미드의 조감도’라고 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든 중요한 사실은 저 도형의 공간적 가치는 저 도형이 어떠한 주제로 보여지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잠정 결론이다. 이것을 가리켜 물리적 대상을 바라볼 때 작용하는 여러 ‘국면들’이라고 불러보자. 각각의 국면들은 감상자의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면서도 그 국면들 자체의 조건은 저 입체 도형이 실재로 객관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외관적 성질들에 기반하고 있다. (각각의 선분들이 어떤 형상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질) 즉 물리적 대상이 거기 있고 감상자가 주관을 통해서 거기 있는 국면화의 조건을 보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주관적으로 본다는 것은 어떠한 식의 보는 것일까? 저 입체 도형을 ‘터널’이라고 본 것과 ‘피라미드’라고 본 것은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입체 도형’이라고 보는 것과는 분명하게 다른 식의 봄이다. 어떤 대상, 즉 저 입체 도형을 본다는 것은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입체 도형의 선분들이 모여있는 방식, 즉 외관적 성질을 어떤 주관적 지각의 통제하에서 미적 국면으로 해석해내는 과정을 뜻한다. 이러한 주관적 지각의 통제하에서 미적 국면을 해석해내는 것을 ‘감지’라고 부른다면 어떨까? 외관적 성질의 객관성으로는 포착되지 않으나 특수한 개성을 지닌 주관적 지각으로 느끼는 것(감지하는 것). 그리고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입체 도형’이라고 보는 것, 즉 물리적 대상의 외관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만 ‘관찰’이라고 한다면? 데카르트의 이원론의 도표를 확장해서 그려볼 수가 있게 된다.
이 도표에서는 물리적인 영역과 심적인 영역이 대립되는 것이 아니고 중요하게 다뤄지지도 않는다. 상호작용한다. 오로지 심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용어는 물리적인 것과 구분되어 번역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부언하겠다)을 바라보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미적 경험의 유형이 유기체적으로 다뤄지고 있다. 이 도표가 가리키는 원리로도 감상자는 ‘관찰’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물리적 대상을 바라보고 이 경우 비미적인 미적 경험이 가능하게 된다. 그리고 ‘관찰’은 심적인 것과 독립적으로 행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 미적인 주관적 경험을 촉발하는 기능을 다룰 수 있다. 도표에 의하면 이와 동시에 주관성도 보장된다. 물리적 대상 그 자체를 보는 ‘관찰’과 미적 대상으로서의 조건을 보는 ‘감지’라는 지각의 모드를 구분해뒀기 때문이다. 결국 한가지 원리로 예술 작품의 여러 국면들과 그런 국면을 바라보는 지각의 모드들이라는 미적 경험의 토대를 설명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의 종합을 가능하게 하는 준비가 된 것이라고 하겠는데 이 원리를 어떻게 적용하는지는 이책을 읽어보면 감잡을 수 있게 되어있다.
(부언) 물리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 오병남님은 원어의 뉘앙스를 우리말로 효과적으로 번역하기 위해서 물리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구분해두었다. 미학에서 ‘물질적인 것(material thing)’은 용어의 일반의미와는 좀 다르게 ‘물리적인 것’과 구분되어 쓰이는 경우가 있다. ‘물질적인 것’은 ‘예술 작품이 구현되어 있는 방식, 결과물’로서 예컨데 뉴먼의 그림을 ‘여성성(빨강)과 남성성(파랑)의 교차점에는 중성(노랑)이 있는 것을 그려낸 그림’이라고 본 대상성을 뜻한다. 반면 ‘물리적인 것(physical thing)’은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것’처럼 보는 대상성으로 두 개념의 조건은 똑같이 공간 속에서 시각으로 인지할 수 있다는 점은 같지만 주관성의 개입 정도가 다르다. ‘물질적인 것’ 쪽이 주관의 개입 정도가 높기 때문에 도표에서는 미적 대상으로서의 감지로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물론 뉴먼의 그림에서 관찰되는 색상 활용을 주관 전의 지각이나 배제한 지각으로 보면 단순히 ‘물리적인 것’이 될 것이므로 (예컨데 뉴먼이 활용한 색상은 어차피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진 것이므로) 올드리치의 도표에서는 ‘물리적 대상’과 ‘미적 대상’ 사이에 미적인 주관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국면으로 동시에 개념화가 되어있다.
제2장 예술 작품
제2장에서 올드리치는 제1장의 미적 경험에 대한 현상적인 분석을 전제로 해서 예술 작품의 성격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다. 올드리치는 예술 작품에 대해서도 미적 경험에 수반되는 물리적인 성격과 정신적인 성격을 모두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예술 작품 또한 그 두 가지 성격에 의해 규정되는 중첩된 원리로 정의내린다. 이를 위한 준비 작업으로 기존의 논의들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한계점을 살펴보는 것으로 제2장을 시작하고 있다. 어떻게 소개하고 있을까?
예술 작품에 대한 논의는 예술 작품이 물리적인 것인지, 정신적인 것인지를 각자의 입장에서 부각시키며 논의되어왔다. 미적 경험을 다루는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논의가 제1장에 소개된 것도 제2장과 연관점에 의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올드리치는 이러한 예술 작품에 대한 논의가 예술 작품의 구체적 사례들을 열거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면 훨씬 다행스럽다고 하면서도 원리적 토대를 묻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기존의 논의를 회피하지 않고 효율적인 설명의 토대를 찾으려고 한다. 가령 피카소가 게르니카를 그릴 때 느꼈던 창조 정신을 재구성한다든지, 역사적 맥락을 살피면서 밝혀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드리치가 제2장에서 추구하는 것은 게르니카가 예술 작품이라면 그것의 속성은 무엇인지 묻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료와 매체, 형식, 내용과 주제, 재현과 표현 등의 개념은 예술 작품에 대한 물리적, 정신적 논의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가야 된다는 것이다. “일단 그러한 조명을 해봄으로써 비로소 그들 개념들은 개개의 예술 작품에 대한 해명과 분석과 비판을 위한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71)
우선 올드리치는 “예술 작품”이라는 말을 언어 철학의 “의미”와 같은 것으로 설정한다. 예술 작품이라는 말의 의미는 지극히 애매하다고 한다. “그건 예술이야”라고 할 때 우리는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예술 작품 일반을 가리켜 말할 때도 있고 어떤 도구가 잘 만들어졌음을 뜻하려고 말할 때도 있다. 예술 작품의 외연이 갖는 의미가 다양하다는 것은 종종 미학적 논의에서 채택한 의미와 일상적으로 혼재하는 의미가 서로의 이해를 방해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가령 조각상도 예술 작품이고 끌 제작자가 만든 세련된 손잡이의 고급 끌도 예술 작품이다. 조각을 그린 조각가도 예술가로 부르고 고급 끌을 만든 직인도 예술가라고 부른다. “조각상 예술인데”라고 말하다가도 “고급 끌 정말 잘 들어, 정말 예술이야”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예술 작품의 분석에 의례 따라오는 재료와 매체의 논의로 논의의 초점이 이어질 때 앞서 언급한 의미의 혼재는 재료와 매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든다. 조각가에게 장갑, 석고가루, 고급 끌이 주어졌다면 이들은 재료인가 매체인가?
우리말로 표현해보면 재료는 ‘작품을 구현하는 도구’가 되고 매체는 ‘작가와 감상자를 이어주는 매개’가 된다. 이렇게 보면 재료는 도구이고 매체는 작품의 표현성이다. 즉 석고가루, 고급 끌은 재료이며 매체는 조각상의 표현성이다.
그런데 영어로 말하면 간단히 정의하기가 어려워진다. 재료는 material인데 material은 도구도 되지만 앞서 논의한 바에 의하면 작품의 물질적인 표현성도 된다. 재료가 도구도 되고 표현성도 된다. 그리고 매체는 medium인데 이 말은 작가와 감상자를 이어주는 매개라는 뜻도 있지만 물감을 개는 매개, 즉 안료나 물을 뜻하는 말, 즉 재료로 쓰이기도 한다. 어찌되었든 정의를 도구와 표현성으로 마무리지었다고 하자. 그렇다고 해도 실재 적용에 문제가 생긴다. 조각은 비교적 구분이 잘 되는 것 같다. 조각과 다른 장르의 예술 작품에서는 어떠한가? 가령 터렛이 분화구로 만든 예술 작품을 생각해보자. 분화구는 해당 작품의 결과물이므로 물질적인 표현성이다. 그런데 해당 예술 작품의 재료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재료이면서 표현성도 되는 것이다. 이것은 조각의 경우와 다르다.
이런 이유로 의미의 혼재라는 것이 끼어들면 각자 다른 맥락에서 서술되었을 때 언제나 같은 원리로 말할 수가 없다는 점을 올드리치는 주목하고 있다. 그래서 다들 예술 작품의 한쪽 면만을 부각해서 말해왔고 그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어느 하나의 원리가 부각되면 다른 하나의 원리가 적용되지 못해서 예술 작품은 형식이라느니 예술 작품은 상징이라느니 하는 논쟁이 생긴다고 한다.
개별화의 원리를 받아들이면 해결되겠지만 올드리치는 하나의 가능한 방식으로 종합적 원리를 시도하려고 했고 어느정도 소기의 목적을 이뤄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제1장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세워둔 현상적 토대 위에서 언어분석을 하고 언어의 뜻을 나름 분명하게 한 연후에 예술 작품에 적용한다. 주목할만한 것은 언어분석으로 이뤄낸 원리가 철학적으로도 일상적으로도 통할만한 수준에 근접한 것 같고 장르간의 차이가 좁혀져 있으며 재료, 매체, 표현, 재현, 형식, 내용과 주제라는 전통적인 미학 개념으로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행되어간다는 점이다.
물론 올드리치가 한대로 하지 않으면 각자의 논증에서 표현이 꼬이게 되는 현상도 배제할 수는 없다. ‘구성적 논증’의 비판 맥락에서 가능한 비판이다. 그러나 언어분석과 미학 개념의 논증에 한가지 예시가 된 것만은 틀림없는 것처럼 보였고 올드리치가 제안한 원리 근거 위에서 논의를 철저하게 발전시켜나간다면 가능한 원리가 되기에 큰 부족함이 없어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뭐라고 논평이 더이상 안되는 것은 올드리치의 문제라기보다는 내 내공의 문제임) 그래서 올드리치는 구성적 논증이 가져올 표현의 꼬임을 해결하기 위해 같은 장에서 용어 사용의 일관성이 보장되는 용어들(가령 팀버, 토운, 컴포지션)을 제안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사람에게 바로 적용하기엔 문제가 있는데 역시 언어 상의 차이다. 콰인이 말한 번역불확정성이랄까? 가령 올드리치는 그림과 악곡, 조각 등의 장르를 통합하는 용어 사용의 일관된 의도에서 팀버, 토운, 컴포지션과 같은 용어를 도입하는데 영어로는 저들 장르 모두에서 다 쓰이는 말이지만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장르별로 다르게 번역할 수밖에 없는 단점이 노출된다. 종합의 조건인 용어 사용의 일관성이 이그러지는 것이다. 가령 토운 같은 경우 우리말로 번역하려면 그림에서는 채도와 명도, 악곡에서는 음색, 조각에서는 재질의 색조 정도로 확고하게 구별되게 되므로 일관된 용어 사용이 안되어서 올드리치의 본래 의도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예상해볼 수 있다. 물론 미학 자체가 이미 서구에서 들어온 학문이므로 오병남님이 원어 그대로 번역하셨듯이 원어 용어를 그대로 쓰면 해결될 문제로 보이긴 한다. 그보다도 완벽한 종합이란 어느 언어권에서도 가능해야 됨이 보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이유로 비판이 된다면 개념을 분리해서 논증하는 것과 다를게 없으며 해야될 이유도 없다고 보는게 무리가 아니게 된다. 올드리치가 대단한 것은 어찌됐든 자기 논증 안에서는 일관된 설명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일관된 종합을 이어가려는 사람에게는 자극이 될 수 있다. 오병남님도 후기에서 번역의 어려움을 언급하시는데 내 생각으로는 정말 잘 된 번역처럼 보였다.
내가 집중해서 본 것은 앞부분 예술 작품의 정의와 재료, 매체에 대한 부분이다. 그뒷부분에 이어지는 형식, 내용과 주제, 표현과 재현 같은 논의도 읽어볼만하게 잘 되어있으니 직접 읽어보시면 수긍이 된다.
제3장 여러 형태의 예술들
제3장에서 올드리치는 예술 장르에 대해서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이는 제2장의 개념 분석과 비교된다. 예술 장르들이라는 구체성을 갖고 구체적인 예술 장르들에 대해서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명되는 도록과는 좀 다르다. 도록에서는 화가의 생애나 역사적인 배경도 다루지만 이 제3장에서 올드리치는 예술 철학적으로 다룬다. 개념만 분석하는 것보다는 좀 완화된 것일뿐이다. 완화되었기 때문에 실재로 행해지는 예술 현장에서 그 예술을 시행하는 무용수의 동작을 논의하기도 하며 건축물을 창조하는 공인의 기량이나 조형적인 것을 그 전 장들에서 제시된 요소들로 녹여낸다. 제2장을 눈여겨봤다면 친숙하게 느껴질 컴포지션이라는 말도 동원되고 구조의 일관성보다는 각각의 장르들이 갖는 특성을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물론 도록처럼 술술 읽혀내려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각 예술 장르들의 요소들을 올드리치는 어떻게 끼워나가고 있는지 읽어볼만 했다.
제4장 예술에 대한 언급의 논리
마지막 제4장에 이르러 올드리치는 이제까지의 요소들을 마무리도 할 겸 예술 언급이란 어떠해야 되는지도 제안할 겸 예술에 대한 언급의 논리라는 제목을 붙여놓고 있다. 흔히 인정되고 있는대로의 방식들로 기술, 해석, 평가를 서두에 언급하면서 각각의 방식들에 대해서 논의를 이행해간다. 나는 여기서 심리학적 해석이라고 올드리치가 분류해둔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그는 심리학적 해석이라는 이름표 아래 모여있는 일군의 입장들 중에서 가장 탁월한 것으로 프로이트와 융의 심층심리학에 관한 이론을 말하고 있다. 무의식과 리비도의 논의가 역시 잠시나마 언급되어있는데. 오이디푸스왕을 구체적 사례로 들면서 심층심리학이 주제인만큼 윤리적인 것만으로 이행하지 않고 플랏 전개의 전면에 등장하는 즐거움의 감정 또는 보상 자극이라는 심리학의 개념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충격요법으로서 오이디푸스왕이 체계적 둔감법의 재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대충 직관해봤는데. (소거와 자발적 회복, 강화) 그런 것도 필요하겠으나 망나니가 아니면 그에 대한 대안이 필요할 것이다. 융의 원형 이미지에 대해서가 그 대안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너무 짤막하게 언급해서 구체적인 것은 요즘 읽고 있는 융에 대한 저작과 심리학 개론서를 봐야 되겠으나 올드리치에 의하면 그가 소개해놓은 세가지의 해석의 논리는 개선의 필요가 있다고 한다. 융의 분석심리학과 예술을 연관지으려는 나로서는 이런 말이 갖는 함축을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봐야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가지 논리에 한가지로 프로이트를 표적으로 하는듯한 느낌이 듬. 가령 내가 우려하는 프로이트의 예술론은 올드리치의 간접 언급을 인용하자면 “…그것이 시와는 달리 마치도 진위의 주장들을 포함하고 있는 논증들을 구성해 놓고 있는 듯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적인 용법은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그리고 그 단어들이 문법적으로는 서술문(declarative sentence)의 질서를 취하고 있다 하더라도 마치도 절규나 찡그림처럼 논리를 전혀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같은 형이상학적인 해석들, 혹은 내가 일반적으로 “구성적인 형이상학(constructive metaphysics)”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이미 사물을 바라보는 경험의 방식이 어떻게 그에 동반되는 언어적 표현의 방식이나 혹은 말하는 법인 적합한 “언어”에 의해 도움을 받고 있으며 혹은 그러한 도움으로 통찰적이 되고 있는가를 주목한 바가 있다. 바이스만이 말하듯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이같은 수식력(modifying power)은 어느 정도껏은 심지어 지각적인 경험의 차원으로까지도 뻗쳐 내려가고 있다. 그것은 사물들이 모이는 방식을 수식하는 것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경우 사물들이란 물리적인 대상으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아니거나, 바라보는 행위가 관찰에 관련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이 관찰마저도 범주적인 국면화와, 따라서 과학의 언어에 관련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p.208) 나는 내가 구현하려는 분석심리학이 예술이론으로 적합하게 되려면 과학으로서의 시지각 이론을 체득하고 예술 친화적인 융의 구성주의적 무의식 이론을 잘 배워야 되며 프로이트에게서 보이는 예술 불화적인 언급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프로이트 리비도의 근원이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발견되는만큼 프로이트의 이론을 완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수식력의 한 구현체가 어떠해야 될지 생각해보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