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적 경험은 대상에 대한 취미 판단이다. 뒤러의 자화상을 보고 느낀 강렬한 색채감과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고 느낀 해학적 감정은 미적 경험의 일종이다. 중요한 질문거리는 무엇이 이런 미적 경험을 가능케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그림 그자체라고 할 것이지만, 그림이 아니어도 어떤 색상의 형태를 지닌 사물을 보고도 미적 경험이 일으켜진다는데서 단순하게 답변이 되지는 않는다. 예술 작품과 예술 작품 아닌 것이 대상이 되서 어떤 원리에 의해 미적 경험이 일으켜진다고 볼 수 있는 구조가 있을 것이다.
뒤러의 자화상이나 김홍도의 풍속화에는 공통적인 것이 그 안에 존재한다. 무엇을 표현했다는 것, 미적 내용이 그것이다. 그림은 선이나 색채, 명암과 채도 같은 미적 내용을 갖는다. 감상자는 각자의 미적 내용을 떠올린다. 미적 내용이 조금씩 다르더라도 그림 집합 전체의 공통된 일반성이라고 하는데, 미적인 것을 속성짓는 미적 속성이기도 하다. 미적 속성은 미적 경험을 특징짓고 대상의 실재 속성일 때 그렇다고 한다. 이는 미적 경험의 구심점이자 유래하는 것이 감상자 외부의 독립 대상이라는 것이며 주관주의가 야기하는 난점들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최소 객관주의의 정초를 하게 한다. 그러나 그러하다고 주관주의의 핵심 제안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객관주의가 말하는 대상은 속성을 갖는다. 미적 속성이란 사태와 사물, 사유의 성질, 이로부터 작품의 감상이 되리라는 보증의 경향성이다. 사태와 사물, 사유가 지닌 진정한 속성이 있다면, 진정한 미적 내용들이 일으키는 미적 경험으로서의 세계이다. 미적 경향성은 따라서, 미적 경험이 주어지게 하는 성질이며 우리가 식별하고 분류하는대로의 현현이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대상의 속성이자, 이차적으로는 감상자의 체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적 대상의 속성은 작가든 감상자든 사유의 경향성이기도 하므로, 미적 경험을 해명하는 개념으로 되기도 한다. 즉 미적 속성은 미적인 사유의 진리 담지자이기도 하고 미적 담론의 규범적 기초이기도 하다.
객관주의적 관점에서 미적 속성은 미적인 것을 가능하게 하는 외재적인 특성을 지녔지만, 대상 내재적인 특성이기도 하고 주관주의의 내재적 관점에서 그것을 느껴야 된다는 것도 중요한 국면이다. 사람의 느낌은 각자 다른 면이 있다. 인류의 미적 경험이 주관적 기초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미적 속성이 존재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존재는 감상자에게 달렸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그 감상이 불러일으켜진 인식 외부의 대상에 대한 보증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게 미적 실재론의 의의다.
객관주의는 주관주의를 보증한다.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이 둘을 조화롭게 이론화하면서도 극단의 주관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대상과 감상 두가지 측면의 공통분모를 찾아야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공통분모를 경향성(disposition)에서 찾고자 한다.
미적 속성은 일정한 경향성으로 예화된 외부 세계의 사물 안에 존재한다. 미적 경험을 일으키는 경향성이란, 사물이 현현하는 것이 표명된 것이고, 그 표명에 의해 지각되면 의미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예술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적 속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공간적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대상으로서의 관계적 속성이 있다. 색채나 소리처럼 오감으로 지각하는 대상이 주어져있고 이를 감상한 감상자가 있어 관게적이다. 이로부터 예술적 체험이 이루어지듯이 공간으로부터 감상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상적 조건에 의해 관계성을 갖는다. 감상자는 이렇게 그 특성에 반응함으로써 감각가능한 속성을 감각함으로써 그 속성을 인식한다. 이는 취미 판단이라고 하는데, 이는 감상자의 경향성이 미적 지각으로서의 대상에 대해 상호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감상자와 감상조건은 구분된다. 감상자의 경향성과 대상의 경향성의 관계에서 어느 하나는 다른 하나에 특권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객관주의적 견해와 주관주의적 견해는 둘 다 존재하는 무엇이지만,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에 특권적이기보다 우선성의 차이로 이해될 것이다. 어제 전시회에 가서 그림을 실재로 보고 느낀 것은 그림의 지각에서 유래했다. 다음날 꿈 속에서 본 것은 그의 지각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미적 경험은 외재적인 지각을 우선적인 전제로 한다. 즉 감상에 있어 주관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일으키는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객관적 대상이 이미 경험에 선제되어야 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이제까지 논구하는데 어느 철학자의 논문에서 개괄한 것을 요약해봤다. 요약이라 논증이 긴밀하지 않다. 어느 단락은 번역 정도로만 해놨으나 다른 단락은 내 스스로 표현해봤다. 핵심은 미적 경험이나 사유는 미적 속성에 의해 가능하며 주관과 대상은 똑같이 중요하지만 대상에 우선권이 있어서, 그 우선권을 인정하는 것이 미적 실재론의 주요 핵심 조건이라는 것이다. 일단 이정도로만 정리해본다.
2.
미적 대상이 주어지면 미적 경험이 발생한다. 미적 경험의 내용은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가, 감상되는 미적 대상 안에 있는가? 전자는 예술적 체험이라는게 각자의 마음에 의하므로 당연하고 후자는 예술적 체험의 객관성이라는 면에서 당연하다. 전자는 너무 심한 주관주의의 극단으로 가면 객관화될 수 없다. 그래서 예술적 주관을 의의 보존하면서도 객관성을 보증할 개념적 장치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논의의 일반적인 토대는 경향성에서 찾는 것이다. 미적 대상이 대상으로서 특징지워지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감상자는 감상자로서 특징지워지는 경향성으로 그것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경향성(disposition)이란, 특정 조건에서 특정 방식으로 대상화될 수 있는 대상의 속성이다. 어떤 관점에 의하면, 경향성은 자연법칙을 따르는 사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한다. 어떤 다른 더 유망한 관점에 의하면, 경향성이란 정당화될 수 있는 조건에서만 그 사태의 힘이 유지되는 사건 사례의 현시 방식을 향해 있는 대상의 진정한 속성으로 정의된다. 주목할만한 점은 속성은 사건 그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잘 성립된 이성에 의해 사건이 일으켜지지 않아도 유리로 된 창문의 잠재태로 속성이다.
이 경우가, 미학적으로 논의에 적합한 진정한 대상적 속성으로 간주된다. 유리로 된 와인잔은 세게 치거나 떨어트리면 깨지기 쉬울 때 그 대상은 깨어지기 쉬운 속성을 지녔다고 한다. 깨어지기 쉽다는 것은 관찰 가능한 경향성이다. 깨어지기 쉬우므로 깨어지기 쉽다는 경향성을 지닌다. 깨어지기 쉬움은 속성, 깨어짐은 사건이다. 돌려말하면 속성은 미적 경험을 이루게 하는 가능 조건이다.
미적 속성은 대상들이 속해있는 경향적인 속성이다. 언제나 현시되지 않아도 예술 작품을 접할 때 그 미적 경향성을 완전히 감지했다고 할 수 있다. 미적 속성은 논리적 차원의 것으로, 우리가 그 속성들을 지각하지 못해도 속성으로서 존재하고 있고, 다만 그 속성의 현시는 특정 조건에서 그 조건의 현시에 의존적인 감상자에게 달렸다고 정리될 수 있다.
감상자의 경향성은 미적 속성의 현시적 조건이 되기도 한다. 와인잔을 보고 형태적인 미에 주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시야가 흐려져 미적 지각의 방해를 받았거나, 교육배경의 차이에 의해 현시된 미적 속성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감상자의 경향성과 미적 속성의 경향성은 상호관계적인 경향성으로, 각자가 각자에게 성립 조건이 되어 현시적인 사태로서 공유지하게 된다.
감상자의 미적인 경험에 의해 미감적 속성이 예지된다. 미감적 속성은 또한 감상자의 미적인 경험의 범위를 결정한다. 서로 상호적으로 관계적인 조건 하에 미적인 것이 가능해진다.
미적 실재론자들은 관찰가능성과 객관화 가능성을 주목하므로, 미적 대상 안에 미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보고 있고, 이에 대해 정신적인 측면인 감상의 의의도 보존하기 위해, 속성의 개념을 도입한다. 일차적으로는 미적 대상 안에 미적 속성이 있다고 간주한다. 그리고 그 대상의 외재적 경향성과 감상자의 내재적 경향성을 같은 개념인 경향성의 체계 내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이를 잘 살펴본다면 취미 판단의 객관주의와 주관주의의 논의에서 모티브를 얻어 미적으로 실재적인 이론을 구체화할 수 있게 된다. 특정 개념을 소재로 하면 구체화가 된다.
그 유망한 후보 중의 하나가 이 글에서 대강이나마 스케치했듯이 “경향성(disposition)”적 개념이다.
3.
경향성은 미적 판단에 의해 예화된다. 미적 판단은 경험적이다. 경험적이므로 그 근거는 주관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규범적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적 판단은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에 의존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판단해야 되는 것이 있고 그렇게 판단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예컨데 위작을 보고 경제적 가치를 매기는 것은 옳은가? 또는 포르노그라피를 제작하고 보급하는 것은 옳은가?와 같은 논제에 대해서 가타부타를 따지려면 규칙에 근거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에서나 예술을 향유하는 일상에서나 미적 판단은 규범적 요청을 선전제한다.
흄과 칸트로부터 제기된 더 심도있는 질문은 “어떻게 이러한 요청이 가능한가?”이다. 이에 대한 가능한 답변은 “우리의 경험이 실제적인 표상 내용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이러한 요청이 가능하다”일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경험적인 기준, 즉 미적 속성들이 오로지 마음에 의존적이라는 생각은 난점을 갖는다. 대상과 인간의 반응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으되, 표상적 의식에만 근거해서 판단된다면 실제로 나타나는 지구 인구 수만큼이나 다양한 주관적 반응에서는 규칙의 상정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나와 그는 동일한 대상에 대해서도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이는 나와 그는 다른 경향성을 가진다고 요약된다. 이 경우, 대상의 속성이 무엇인지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나와 그의 반응이 같다고 여겨지려면 동일한 기준이 가능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마음에 독립적인 기준이 필요하다. 이는 마음에 의한 경향성 뿐아니라 대상마다 내재되어 있는 경향성이 있음을 인정하면 해결이 될 것 같다.
예컨데 아름다운 장미를 보고 나와 그가 아름답다고 느꼈다면, 경험적으로 다른 과정을 거쳐서 그러한 미적 판단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아름다움”의 속성은 마음 독립적인 기준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장미에 아름다움의 경향성이 존재해서 우리가 그것의 예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마음 독립적인 속성적 경향성이 존재한다는 실재론의 이점은 판단과 판단의 틈을 메꿀 수 있다는 것이며 의존적으로 옳고 그름도 따져볼 수 있게 할뿐아니라 각자의 불일치를 줄일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판단이나 경험이 옳은가 나쁜가 또는 어떤 기준인가에 관심을 가질 때 판단과 사실 사이의 대응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관계적 속성이다. 비실재론은 대상적 사실보다 주관적 느낌을 중요시하므로 이 질문에 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실재론에서도 난점은 있는데, 실재적인 설명이 쉽지만, 사실과 다른 고유의 경험이나 사적인 것의 고유 특성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예컨데 감각질을 속성화할 경우, 개개인의 고유의 경험의 결이 누락될 가능성이 있다.
왜 모든 반응들은 동등하지 않은가? 어떤 반응은 승인하고 어떤 다른 반응들은 승인하지 않는다면 그 기준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묻는다. 이 질문의 기저에는 형이상학적인 설명이 요청되고 있다. 즉 미적 판단이 경험적이라 주관적일 때 그 규칙성에 대해 보증하는 설명 체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재론은 대상 내재적인 경향성과 감상자 내재적인 경향성을 동시에 경향성이라는 틀에 의해 살펴봄으로써 해법을 찾으려고 한다. 전자는 존재적 경향성이라면 후자는 경험적 경향성이다. 이는 깨어지기 쉬움이라는 경향성이 실재 깨어지는 사건으로 드러나듯이 존재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은 인과적으로 연결됨을 의미하고, 이는 미적 판단에 있어 어떠어떠하게 될 것임이라는 경향성이 가능태로 존재함을 주목해야 함을 의미한다고 본다. 미적 판단은 이러한 존재적, 경험적, 인과적, 가능적인 속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즉, 대상과 감상자 모두에게 내재된 경향성이 그것이 어떤 속성인지를 결정한다.